사우디 알코바 공공주택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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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소연 기자]바그다드 의료단지 공사가 한창 막바지에 이를 무렵인 1983년, 당시 정수현 차장(현 현대건설 사장)은 미국 뉴저지 지점에서 4년여 간 근무하다 본사로 복귀했다. 그래서 모처럼 가족과 서울 생활을 시작하려던 어느 날, 갑자기 이라크의 바그다드 의료시설 현장(MECY)으로 출장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이라크는 한창 전쟁 중이었기에 불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현장 근무 명령이 아니라 일시적인 출장 명령이었으므로 다소 가벼운 기분으로 출국했다.


바그다드 의료단지는 거의 준공을 앞두고 있는 상황인데, 워낙 까다로운 감독관의 현장 검측 때문에 공사 진행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이라크는 당시 전쟁 중이라 남자들이 전장에 나가는 바람에 공사 현장에는 주로 여자들이 감독관으로 파견돼 있었다. 바그다드공대 건축과 출신의 젊은 여자 감독관은 미혼이었는데, 검수 과정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몰랐다. 정수현 차장이 여자 감독관 때문에 한창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였다.

“전쟁 중이므로 이라크에는 생필품이 모자랍니다. 여자 감독관이니까 여성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선물해 보세요.” 영국 감독관 부인의 조언에 정수현 차장은 무릎을 탁 쳤다. 그 후 업무나 휴가차 한국 본사와 이라크 현장을 수시로 오가는 직원들을 통해 여성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긴급 공수했다. 손수건, 테이블보, 기초 화장품, 스타킹, 속옷, 심지어는 생리대까지 공수했다.


이러한 선물 작전은 맞아떨어졌다. 처음에는 선물을 잘 받으려고 하지 않았으나, 비교적 가격이 싼 생필품이므로 뇌물의 성격과는 달랐다. 따라서 차츰 거부 반응을 보이던 여자 감독관의 마음이 누그러져 나중에는 선물을 건넬 때마다 아주 고마워했다.

그리고 그 후부터 깐깐하던 태도가 달라져 우호적으로 변했다. 그 덕분에 까다롭던 현장 검측이 수월하게 진행돼 무사히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정수현 현대건설 사장은 기자들을 사석에서 만나면 입버릇처럼 해외현장서 겪었던 어려움을 추억처럼 되새긴다. 현대건설의 해외수주 1000억 달러 돌파는 한국의 건설역군들이 현지에서의 문화차이에서부터, 때로는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험난한 현장에서 힘들게 일군 성과이기에 더욱 값지다.

싱가포르 마리나센터

싱가포르 마리나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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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1966~1968년)…젖은 골재를 건조기 대신 철판에 구워서 말려


현대건설이 처음 태국에 가지고 갔던 장비는 재래식 도로공사에서 사용하던 구식의 노후장비였다. 그나마도 절대다수가 부족했다. 불도저, 로더 등 일부 장비는 신제품을 구입하였는데, 기능공들이 사용방법을 몰라 석 달도 채 못 가 고장이 나버리고 말았다.


태국은 비가 많은 나라여서 모래와 자갈이 항상 너무 젖어 있어, 그대로 섞을 경우 함수량이 맞지 않아 아스콘이 제대로 생산되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을 2~3개월간 고심한 후에야 알아내어 건조기에 자갈을 넣고 말리려고 했으나 건조기 자체의 온도가 올라가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정주영 사장이 와서 보더니 ‘건조기에 비싼 기름 때 가면서 말릴 게 뭐 있느냐, 골재를 직접 철판에 놓고 구워라’ 하고 지시했다. 과연 건조기를 이용할 때보다 생산능률이 2~3배까지 높아졌다.


당시 정주영 사장은 한 달이면 일주일은 태국에 와서 살다시피 했다. 기후 등 여러 가지 악조건으로 공사가 부진했기 때문에 그가 오면 으레 현장 직원들은 야단을 맞기 일쑤였다. 또한 토취장에서부터 현장까지의 작업로에는 운반하던 돌들이 몇 개씩은 떨어져 있기 마련인데, 그는 차를 타고 가다가 혹시 그런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차에서 내려 손수 돌들을 한쪽으로 치우곤 하는 통에 현장 직원들이 쩔쩔 맸다.


또 정주영 사장은 새벽 4시에 현장에 나와서 기계를 돌렸을 정도로 의욕이 강했다. 장사들도 기계를 돌리고 나면 몸이 덜덜 떨릴 정도이니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이처럼 정주영 사장이 솔선해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기술자들이 많은 자극을 받았다.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는 현대건설이 국제적으로 발전하고 진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공사였다. 비록 수지면에서는 상당한 적자를 보았지만, 세계 속의 현대로 성장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닦았다. 또한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시공경험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말레이시아 페낭대교

말레이시아 페낭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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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렌인 아랍 수리조선소(1975~1978년)…물 부족해 콜라로 양치질하며 공사 수행


바레인 아랍 수리조선소는 현대건설이 중동에서 수행한 최초의 대규모 공사이자,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이 있게 한 모태이기도 하다.


공사 초기에는 중동 기후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식수가 부족해 콜라로 양치질을 하는 일도 있었고, 합판조각 위에서 텐트를 치고 지내다 12월부터 시작된 우기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애를 먹은 것은 자연환경에 따른 골재 문제였다.


바레인 내륙지방의 석산에서 가져온 암석들은 석회질 성분이라 물을 머금으면 곧 흐물흐물해져 버렸고, 바다에서 퍼 올린 모래에는 이물질이 많아 여과 과정을 수없이 거쳐야 했다. 또한 모래와 개흙으로 이뤄진 매립지다보니 파일을 박는 일도 어려웠을 뿐더러, 배근한 철근들이 몇 시간 뒤면 바로 녹이 슬 정도로 습도가 높았다.


울산조선소를 통해 조선소 공사의 충분한 경험을 쌓은 후였지만 외국의 엄격한 기준과 규격을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아랍 수리조선소 공사는 특별했다. 품질관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한 당시 한국 건설문화 풍토에서 영국과 포르투갈로 이원화된 까다로운 감독은 다소 억지처럼 여겨질 때도 많았다.


처음엔 공기를 맞추느라 그들의 요구를 따랐지만 나중에는 우리나라 자재들을 추천해서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특히 해수공사에 사용하는 5종 시멘트의 경우, 단양에서 가져와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영국 기술회사는 시멘트클링커 공장에 감독관을 상주시키고 매일 시멘트 품질을 검사했는데 단 하루도 불합격 판정을 받은 적이 없었다. 덕분에 우리나라 시멘트의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나중에는 현지 업체들까지 시멘트를 사기 위해 줄을 서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페낭대교(1982~1985년)…현장소장, 퇴근시간 없이 공사 진두지휘


페낭대교는 1985년 완공 당시만 해도 세계 세 번째로 긴 다리였으므로 입찰경쟁 당시부터 이미 건설 부문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입찰에 참여한 회사만 해도 현대건설을 비롯해 호주 1개사, 프랑스 5개사, 독일 3개사, 일본 13개사 등 세계 유수의 건설사들이 대거 참여해 각축전을 벌였다.


당시 가격 면에서만 따질 경우 입찰 참여회사 중 프랑스의 캄프농 베르나사가 최저입찰로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현대건설은 그 회사보다 공기가 1년 빠른 3년으로 잡아 수주에 성공할 수 있었다. 가격을 내리지 않는 대신에 공기를 앞당겨, 1년의 통행료를 받게 될 경우 더 이익이 된다고 말레이시아 정부를 설득시킨 점이 주효했던 것이다.


“당시 정주영 회장님의 지론이 ‘사람을 만나는 일에 손해를 보면 안 된다’면서 늘 우리에게 ‘인사해서 돈 드느냐?’고 하셨지요. 말레이시아 총리 내외가 울산 현대자동차를 방문했을 때 정주영 회장님께서 직접 주스를 서빙했지요. 그랬더니 총리 내외가 깜짝 놀라는 거였어요. 그날 정주영 회장님은 마하티르 총리에게 포니 한 대를 선물했는데, 말레이시아에 가서 총리가 그 차를 그렇게 애용했다는 겁니다. 지금도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기념관에 가면 그 포니가 전시돼 있어요. 이처럼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나 정부 관료들은 현대건설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어요. 페낭대교를 수주할 수 있었던 것은 공기를 3년으로 계획한 것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지만, 현대건설에 대한 좋은 이미지도 작용했다고 봐야 합니다.” 당시 말레이시아 현대건설 지사에 근무한 김영환 지사장의 회고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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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대교 현장에서는 휴일도 퇴근 시간도 없었다. 일요일인데도 현장소장이 나와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개흙에 들어가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것을 본 말레이시아 기자들은 다음날 신문에 ‘한국 사람들은 Around the-clock(24시간)’이라는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실어 한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장 난공사였던 것은 직경 1m, 길이 60m의 당시 세계 최대 콘크리트 파일을 3000개 이상 박는 작업이었다. 그것도 바다 한가운데서 20t급 증기 해머로 작업을 했는데, 컴퓨터로 원격 조정을 해 무려 5000회 이상 때려야만 파일 하나를 박을 수 있었다.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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