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메신저]아들 생명 구한 어느 老母의 속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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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한복패션이 올 추석 한복 수요를 높였다고 한다. 한복은 오랜 세월동안, 그 시대의 문화에 적응하며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4~7겹의 속옷으로 아랫도리를 단속했다. 그 많은 속옷 중 오늘의 '속치마'는 없었다. 가장 속에 입던 다리속곳은 좁고 긴 기저귀 같았다. 영화 '관상'에서 보았듯이 입었다기보다 가지랑이 사이에 찼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 위에 입은 속속곳, 단속곳, 너른바지는 긴 치마바지였다. 바지가랑이들은 통이 매우 넓었다. 속바지는 오늘의 속바지와 비슷하나 밑이 터져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용변을 볼 때, 3개의 치마바지들은 한쪽 가랑이를 쭈욱 올린 후 옆으로 밀어 붙이고, 속속곳과 단속곳 사이에 입은 바지는 터진 밑을 벌려야했기 때문에 급하면 실수가 잦았다. 아랫도리를 함부로 노출하지 못하게 한, 이른바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유교적 사고가 만들어낸 고통스런 의복 문화였다.

대슘치마는 12폭 모시 치마다. 밑단에 4cm 정도의 창호지를 모시로 싸 붙여, 밑이 넓게 퍼지도록 했다. 무지기 역시 모시로 3~7층을 붙인 무릎길이의 층층 스커트다. 각층이 연분홍, 연푸른, 연노랑 등, 무지개 같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페티코트 기능을 했다. 이것들은 각각 겉치마처럼 수평의 말기를 달아 가슴에서 꽉 조여 입었다.


'속치마'가 등장한 것은 개화기 이후였다. 선교사들이 들어와 포교와 더불어 여성교육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화학당이 열렸다. 체조시간이 문제가 되었다. 학생들은 저고리 길이가 짧아서 겨드랑이가 다 나오기 때문에 손을 올리지 않으려했다. 뿐만 아니라 꽉 조여 입는 하의들이 가슴을 압박해 성장기 학생들의 유방 발육을 저해했다.
당시(1912년) 이화학당의 교장 월터(Miss Jeanette Walter)가 이 문제 해결에 나섰다. 서양복의 기본 웨이스트 원형을 활용하여 허리까지 내려오고 가슴도 조이지 않는 '조끼허리'를 개발해 치마에 붙였다.

세상이 달라지면서 옷에도 변화가 왔다. 신여성들부터 다리속곳 대신 팬티를 입었고, 속바지만 남긴채 거추장스런 속옷들을 벗어버렸다. 그리곤 조끼허리를 댄 '속치마'가 등장하여 복잡한 속옷들을 대신했다. 이렇게 시작한 '속치마'는 여인들과 격변기의 역사를 함께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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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치마에 얽힌 이야기 한토막>
1988년 8월6일, 언론사(史)에 한 획을 긋는, 이른바 언론인 테러 사건이 터졌다. 중앙경제 오부장이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라는 칼럼을 월간중앙에 올렸던 게 필화의 원인이었다. 정보사 군인들이 출근길의 오부장 허벅지를 길이 34cm, 깊이 3~4cm로 난자한 식칼 테러였다. 출근하던 아파트 경비원이 현장을 목격하고 오부장 집에 달려갔다. 집에 있던 노모와 중2년생 아들이 뛰어나왔다. 행인들은 모두들 가던 길을 멈추고 겁먹은 채 '구경만'하고 있었다.


달려나온 노모는 피흘리며 쓰러져 있는 아들을 보자마자 미처 울사이도 없이 이를 한번 악물더니, 겉치마를 걷어 올리고 하얀 속치마를 이로 물어뜯은 후 주욱죽 찢어 아들의 피범벅 상처를 동여매기 시작하였다. 가슴 떨리는 순간이었다. 가닥가닥 찢긴 속치마는 하얀 긴급 붕대가 되었다. 교육이란 받아본 일도 없는 노모의 지혜가, 뒤늦게 우리 옷에 합류한 속치마와 함께 아들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옷과 함께한 지혜요 역사의 한토막이다.


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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