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험난해도 포기할 수 없는 싸움 ?" 뮤지컬 연출의 세계
배해일 서울 뮤지컬 아카데미 대표를 통해서 본 연출가의 꿈과 예술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지난해말 공연예술 부문 저작권 관련 세미나에서 한 토론자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그는 30여년 동안 뮤지컬 분야에서 연출을 담당해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어" 현장예술인이라서 토론이 낯설다"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집식구 먹여 살릴 궁리에 몰두한 가장의 자세로 뮤지컬을 연출해도 아무런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그는 "뮤지컬을 성공시키기 위해 집 팔고 빚 내는 연출가들이 수두룩하다"며 "권리 배분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경우 뮤지컬의 성장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그는 꽤 성공한 뮤지컬 연출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다름 아닌 뮤지컬 국내 1호 음악감독이자 최초의 창작뮤지컬인 '사랑은 비를 타고'의 연출자인 배해일 서울뮤지컬아카데미 대표(사진)다. 도대체 무엇이 집 팔고 빚내서 작업을 하게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우리들에게 뮤지컬 연출가는 생소한 직업이다. 춤과 노래로 가득찬 무대의 지휘자. 그 세계의 성공한 연출가마저 '권리'와 '시장의 어두운 그늘'을 토로할 정도라니…. 한 연출가의 삶을 엿보러 찾아간 서울 방배동 '서울뮤지컬 아카데미'에는 연습중인 뮤지컬 배우들의 거친 숨결로 가득차 있었다.
◇ "무대가 있어 행복했다"="연탄으로 불 피우던 시절 연출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명동은 여전히 활기 찼다. 밤마다 문화예술인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통기타와 팝송이 울려 퍼지는 음악다방에는 젊은 청춘들의 발길이 북적였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배고픔도 잊은 채 모두 신난 표정이었다. 서로 기댈 수 있어 따뜻했다. 선배들을 따라 다니며 주워 듣는 풍월로 공부했다.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밤마다 수많은 일화가 태어나고 그 일화들이 모여 명동시대의 막바지를 이뤘다. 나는 명동의 말석이나마 선배들과 함께 하는게 좋았다. 그게 머나먼 고행길이 될 줄도 모른 채…".
뮤지컬이란 용어조차 생소하던 81년. 배해일은 극단 '현대극장'에 입단, 조연출을 시작했다. 윤복희, 추송옹, 유인촌 등이 극단 소속배우로 활동했다. 당시 김상열 감독 밑에서 연출 수업을 받았다. 극단에는 수천장의 레코드판이 있어 토로트부터 클래식까지 모든 장르의 음악을 맘껏 들었다. 극단에선 정극,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실시했다. 조연출이라고 해봐야 잡일 뿐이었다. 감독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묻지도 않고 그저 보좌하느라 진땀 흘렸다.
그러던 83년 연극배우 추송옹씨가 그를 불렀다. 추씨는 다짜고짜 "자네 입봉(연출 데뷔)하지 않으려나 ?"하며 연출을 권했다. 추씨는 당시 명동성당 뒷편 삼일로의 극장' 창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 올려진 뮤지컬이 '환타스틱스'(철부지들)이다. 추송옹, 최종원, 이혜영 등이 참여했다. 비록 100석도 안 되는 소극장이지만 연일 만원사례를 이뤘다. 그는 "기라성같은 배우들과 함께 연출을 담당한다는 것은 행운"이라며 "돈 한푼 벌리는게 아닌데도 즐거웠다"고 술회했다.
그리고 한동안 콘서트, 무용, 연극, 88서울 올림픽 음악분야 등에서 프리랜서 연출가로 활동했다. 94년. 비로소 극단 '신시 뮤지컬 컴퍼니' 창단작품으로 '맘마미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무대에 올려질 때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다. 국내 뮤지컬 부문에선 음악감독 1호다. 당시 뮤지컬은 외국 번안작품이 일년에 한두개 무대에 올려지는 정도였고, 음악감독이라는 호칭조차 생소했다. 조연출의 역할도 명확한 구분이 없었다. 지금처럼 무대, 조명, 음악, 작가 등 스텝들을 구성해 작품을 만들지도 않았다. 공연은 대성황이었다. 마흔 두살, 언론이 '혜성같이 나타난 신예 연출가'로 소개할 때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기도 했다.
이에 고무된 그는 95년 설도윤 등과 '서울뮤지컬 컴퍼니'와 서울 뮤지컬 아카데미를 창립,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를 무대에 올렸다. 배우로는 남경주, 남경읍 형제와 최정원이 참여했다. 공연은 서울 삼성동에 소재한 250여석 규모의 현대백화점 '토아트홀'에서 펼쳐졌다. 4인조 밴드가 음악을 담당했다. 첫 공연을 마친 후 관객들은 모두 고개를 떨군 채 말없이 홀을 빠져 나갔다. 배대표는 이 광경을 보고 "망했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그는 공연을 본 지인에게 소감을 듣고서야 안심했다.
"관객들은 공연을 끝나고도 눈물을 훔치느라 고개를 들지 못 했다. 처음엔 반응이 없는 줄 착각했다. 감동받았다는 말을 듣고 가슴속에서 뜨거운데 치밀어 올랐다. 첫 창작뮤지컬이라서 뮤지컬 공연계 전체가 관객 반응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창작뮤지컬이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도 많았다. 그래서 소규모 공연장을 선택했다. 첫 공연이 끝난 후 입소문을 타고 관객이 밀려들었다. 사회 환경적으로 소득 증가가 뮤지컬 수요로 이어진 것도 성공 요인 중 하나였다."
배대표는 2002년 1000회 공연에 이를 때까지 연출을 맡았다. 이후 제작사가 바뀌어 3000여회 이상 공연된 이후 13년만에 막을 내렸다. '사랑은 비를 타고'의 성공은 우리나라 뮤지컬 공연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후 폭발적인 성장이 일어나면서 뮤지컬 제작사가 속속 생겨났다. 배대표는 "국민소득 1만5000여 달러에 이르자 뮤지컬 수요가 형성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았다. 실제로 '사랑은 비를 타고'는 우리 뮤지컬의 가능성을 확인한 작품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런 한편으로 뮤지컬 배우 육성에 나섰다. 지금에야 전국 40여개 대학에 뮤지컬 관련 학과가 있지만 당시 배우들은 대학에서 연극 영화를 전공한 학생이 대부분였다. 그래서 노래보다는 연기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배우층도 워낙 엷어 전문배우가 드물었다. 대작을 올린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도 뮤지컬 아카데미를 통해 배우를 기르면서 작품을 만들어갔다.
여전히 투자도 없고, 음향, 무대 등 기술적인 측면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마케팅 개념도 없었다. 그저 사람을 모아 무대에 올리기에 급급할 정도로 구태한 방식이 판쳤다. 모두들 변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96년 그는 설도윤, 삼성영상사업단 등과 더불어 음향기술, 조명 및 투자, 마케팅 등 기업 경영기법 및 각종 기술을 도입했다. 그 때 올려진 작품이 '브로드웨이 42번가'다. 무려 6억원의 로열티를 주고 연출 및 각종 스텝, 판권 등을 미국에서 데려왔다. 로열티는 지금의 뮤지컬시장을 감안해도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당시 음향은 지직거리고, 공연 중간에 전기가 나가는 일조차 발생했다. 투자여건은 물론 기술적인 측면 하나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창작 뮤지컬 대신 브로드웨이 42번가를 올린 것은 외국을 배워야한다는 절박한 심정 때문이었다. 현지를 답사하고, 공연 스텝 모두를 불러왔다. 연출인 나는 음악 등 우리 스텝들에게 철저히 배워 기술력을 최단시간내에 끌어올려야한다고 독려했다. 수개월동안 각 장르별로 책 여러권 분량의 자료를 축적할 수 있었다. 나중에 우리 스텝은 '난타', '명성황후'가 브로드웨이 공연에 동행해 기술문제를 해결해줬다. 그래서 우리 뮤지컬의 성공적인 해외진출에 일조할 수 있었다."
그의 뮤지컬 인생은 액면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배대표는 "여전히 배고프고, 돈 한푼 집에 가져갈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면서 상처를 받기도 했다. 첫 창작뮤지컬이 1000회에 이를 즈음 저작권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작곡가와 대본을 담당한 작가가 새로운 제작사를 물색, 뛰쳐 나가 따로 공연을 올렸다.
배대표는 "그들의 권리라고 주장하지만 연출은 대본 작업, 음악에도 처음부터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무대 조명의 각도, 배우 동선 하나까지 다 점검하고 조율해 무대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연출의 창의성은 인정받지 못 한다. 그러다보니 중간에 모두들 뛰쳐나가 딴 살림을 차려도 하소연할데가 없다. 뮤지컬 시장이 혼탁해지는 이유다. 이런 걸 개선하고 싶었으나 아직도 요원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껏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뮤지컬 연출 인생 외길을 걸었다. 이제 나이 60세. 그는 앞으로 재능기부를 통해 소외계층을 위한 뮤지컬 제작에 나설 계획이다.
◇ 연출가의 길="뮤지컬이라는 장르는 유별나다. '연극이 배우예술'이라면 '뮤지컬은 스텝예술'이다. 무용, 연극, 음악, 미술을 총망라한다. 어떤 능력을 가진 스텝이 모이느냐가 성공여부를 결정한다. 연출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다.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리더십이다."
그가 조연출을 시작할 당시 선배 연출가들은 배우의 뺨을 때리거나 욕설, 폭력을 가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공연 연습을 할라치면 모든 스텝은 물론 대사 한마디 없는 배우조차 하루종일 객석에 앉아 대기했다. 연습장에는 항상 연출의 목소리가 찌렁찌렁 울렸고, 모두 책망을 듣지 않으려고 주눅 들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항상 배우와 스텝을 존중하면서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첫 공연이 끝나면 으레 연출은 모두 불러모아놓고 엄하게 지적하고, 혼내기 일쑤였다. '며칠밤을 새면서 무대를 준비하느라 힘들었을텐데...' 늘 안타까웠다. 첫무대는 대체로 시간을 다투며 밤샘작업을 통해 이뤄지는게 보통였다. 어느 것이 잘못 됐는지 점검조차 쉽지 않았다.
그런 판국에 연출로부터 욕을 먹은 스텝과 배우는 삼삼오오 공연장 근처에 모여 쓴 소주를 몇잔 들이키고 흩어졌다. 개중에는 '다시는 뮤지컬을 쳐다보지도 않겠다'며 돌아섰다. 그래도 다음날 다시 돈 한푼 벌리지 않는 공연을 위해 모여들었다. 그 때마다 '예술이 뭐길래...'라는 의문이 밀려들었다. 배대표는 "연출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나 작품을 성공할 수는 없다. 진정한 연출가는 배우와 스텝을 포용하는데서 나온다. 존중하고, 사랑하고, 아끼지 않으면 누가 무대를 사랑하겠나 ? 연출의 덕목에서 작품에 대한 이해력, 분석력 못지 않게 모두를 아우러 무대를 만드는게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뮤지컬은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소중하다. 우리는 이 바닥에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가 행복해야 관객도 행복하다. 우리 선배들은 일본식 연출법을 배워 위계 질서나 복종, 강압, 일사분란한 생활을 강조했다. 그러나 예술하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창의성을 끌어내기가 어렵다. 연출가는 작품만 책임질 수 없다. 과거 연출가들이 집을 저당 잡힌 돈으로 작품을 만들었고, 투자할 돈을 빌리러 돈출 찾아 헤멨다. 지금은 뮤지컬 시장이 수천억원대로 성장하고, 관객도 늘어나 모두가 배 곪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힘들다. 일년에 100여작품이 무대에 올려져 3∼4개 작품만이 성공한다. 새로운 수요와 시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각 장르별 저작권부터 바로 잡아야한다."
그는 지금 뮤지컬 공연계에 거품이 많다고 주장한다. 수많은 작품과 공연자들로 득실거린다. 그러나 작품과 흥행, 사람 모두를 책임지는 연출가가 드물다. 이제는 살아 숨쉬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절이 아니므로 새로운 일꾼들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야한다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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