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사회를 구현하자는 데 대해 부유층은 흔히 포퓰리즘적 발상이라며 비난한다.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감세정책도 마찬가지다. 포퓰리즘이 비난 받는 것은 그 사회가 나아가야 할 정도와 원칙이 있는데도, 정권 유지나 획득을 위해 이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복지사회 추구가 사회적 약자층의 표를 의식한 것이라면, 같은 논리로 부자에 대한 감세 또한 부유층의 표를 얻기 위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차라리 '증세는 싫다. 그러니 무상복지는 안 되겠다'는 오세훈식 논법이 당위성은 차치하더라도 솔직하다.
이런 정신에서 볼 때 세계적 부호 워런 버핏과 안철수는 의미와 가치가 있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두 사람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복지사회를 구현하려면 국가재정이 튼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버핏은 부자에 대한 증세를 역설했고, 안철수는 사회에 대한 기부를 실천했다. 따지고 보면 복지재원으로서 세금이나 기부금은 동급이다.
다만 세금이 공공 목적으로 사용되는 공공재이고, 기부금은 기부자의 뜻에 따라 수혜자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국가주의적 사고가 강한 유럽에서는 기부금보다 세금을 더 선호한다. 이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우리나라 세법은 기부금에 대해 일정 한도만 경비로 인정하고 있다. 복지재원 마련을 위해서는 세율 인상뿐 아니라 기부금 관련 세법 규정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외국 부자 중에는 세금을 더 내겠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우리네 부자들은 침묵하고 있다. 기부도 별로 하지 않는다. 아마도 국가재정 위기나 사회 양극화는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로 여기거나 세금은 많이 내는데 국가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할 때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집단은 바로 부유층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지금처럼 애써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버핏은 국가부채 증가야말로 미래사회의 주역인 청소년들의 꿈을 갉아먹는 파렴치한 행위로 본다. 그래서 자본소득에 대한 세율을 근로소득 세율만큼 올려 세금을 더 거둠으로써 국가부채를 조금이라도 줄이자는 것이다. 안철수의 기부금도 이와 취지가 비슷해 보인다. 국가재정이 취약해짐에 따라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 약자층을 돕겠다는 것이다.
둘 다 현재보다 미래사회 구성원의 앞날을 걱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토양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만하다. 이들의 행위가 우리의 미래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복지사회 구현을 위해 증세 정책에로의 변경이나 기부문화 확산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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