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백남준 선생을 기억하며…

[아시아경제 박지선 기자]



“내가 죽어야 작품 값이 오르거든”

“예술가는 슬퍼. 모두 나 죽기만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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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7월 20일, 고 백남준 선생이 태어난 날이다.
2011년 오늘은 선생이 탄생한 지 79주년 되는 날이다.


기자는 1997년 뉴욕에서 백남준 선생을 인터뷰했다. 당신 패션 디자이너 인터뷰를 위해 출장을 준비하던 중 몇 달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백선생이 빠른 회복 중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무작정 섭외 전화를 넣었다.

“백남준 선생님 댁인가요?”
“나요.”
수화기를 타고 넘어오는 거친 한 마디 음성.


“인터뷰? 알았어. 소호에 있는 카베하츠라는 레스토랑으로 와. 2시. 나는 거기서 점심식사하고 있을 거야. 특별한 일 없으면 나는 거기서 매일 밥 먹고 차 마시고 그래.”


주소를 알려 달라는 말에 “소호에 와서 물어보면 사람들이 다 알아. 그냥 와. ”


전화는 바로 끊겼다. 무모한 도전같았다. 어쩌면 이번이 인터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었다. 휠체어에 의지한 백남준 선생의 사진을 본 기자는 쾌유를 빌기보다 인터뷰 성사에 더 조바심을 냈던 게 사실이다.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거의 한잠도 못 이루고 백남준 선생에 관한 자료를 읽고 또 읽으며 만남의 순간을 상상했다.


약속된 날 소호 거리에 12시쯤 도착해 약속 장소인 카베하츠 레스토랑을 찾았다. 동유럽 음식을 파는 전문 레스토랑이라는 정보까지는 얻었으나 주소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시간. 소호 거리를 몇 번이나 왕복했지만 그 카페를 찾을 수 없었다.


4시쯤 되어 땀 범벅이 된 채 선생 댁에 다시 전화를 했다. “여태 기다리다 왔다구. 못 찾았단 말야? 지금 어디라구? 그 공중전화 박스에서 조금 올라가며 건너편에 있어. 낼 2시에 다시 봐.” 전화는 또 끊어졌다.


신기하게 다시 걷다보니 레스토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카페 주인은 선생과 선생의 부인이 식사하러 왔다가 3시쯤 일어났다고 전했다.


백남준 선생과 뉴욕 소호 거리를 지나자
뉴요커들은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거나 박수를 보냈다.


다음 날, 선생을 만났다. 선생의 부인은 감기 기운이 있어 함께하지 못했다. 위대한 예술가 부부를 만나지 못한 아쉬움, 그러나 나는 백남준 선생을 만났다.
“예술가는 슬퍼. 모두 내가 죽기 바라거든. 그래야 그들이 사놓은 작품 값이 오르잖아. 그래서 예술가는 사기꾼이야. 살아남아야지.”


백남준-코끼리 마차

백남준-코끼리 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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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과 나는 작업실로 가기 위해 카페를 나섰다. 선생 곁에는 건장한 체구의 보디가드가 있었고 나는 휠체어 구르는 속도에 맞춰 소호 거리를 걸었다. 몇몇 뉴요커들은 선생 알아보고 박수를 보내거나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선생의 작업실은 만물상이었다. 로보트 조립, 혹은 건물 공사를 진행하는 현장과 흡사했다. 화면 조정 중인 텔레비전의 어지러운 흔들림 속에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감시하던 작업실의 어시스트 눈빛도 잊을 수 없다. 행여, 내가 작업실에 떨어져 있는 선생의 흔적이 묻은 연필이나 작업 도구를 가져갈까 경계하는 눈치였다. 그 모든 것은 그냥 연필이 아니고 평범한 나사가 아닐 테니까.


실제로 기자는 선생과의 인터뷰를 기록하기 위해 녹음했던 테이프를 오랫동안 간직했었다. ‘저걸 나중에 내다 팔면 비싼 값에 팔리겠지? 사인도 많이 받아둘까?’ 하는 얕은 생각도 했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기자가 근무하던 잡지사에서는 특종 인터뷰라며 스태프 모두 흥분해있었다. 그 며칠 후 경쟁 잡지 후배로부터 백남준 인터뷰를 추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싫었다. 뉴욕으로 전화를 했다. “이달에는 다른 매체에 인터뷰 하지 말아주세요”라는 부탁을 드렸다. “걱정마. 안 할 거야.” 전과 달리 부드러운 전화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달, 경쟁 잡지에도 선생님의 인터뷰가 실렸다. “무작정 카베하츠로 찾아왔더라구. 나는 인터뷰 안하려고 했었어. 그래도 난 약속 지켰어.” 유명 화랑의 큐레이터들이 백남준 선생을 ‘아이와 닮았다’ 했는데 백배 공강한다.


선생의 작품세계에 대한 글과 이력은 충분히 많다. 기자라는 명함을 갖고 살면서 가장 벅찬 만남으로 기억되는 이름 백남준. 그 분을 기억하는 일, 그저 오늘 선생의 탄생일을 맞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은 감정이 들었다. 선생은 2006년 1월 29일 타계했다.


최근 선생의 유작이 경매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 받지 못 한다는 보도를 접했다. 작품의 부속품 공급에 어려움이 주된 이유 중 하나라 했다. 중국 작가들이 국력을 바탕으로 미술 시장에서도 인정받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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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이 내 게 선사했던 빛나는 순간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는 길이 과연 있을까? 우선 이번 주말 용인에 위치한 백남준 아트센터에 가 봐야겠다. 그곳에 가면 해답을 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박지선 기자 sun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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