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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드 원조’ 변진섭을 말하다①, “아 발라드!, 서태지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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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드 원조’ 변진섭을 말하다①, “아 발라드!, 서태지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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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투데이 황용희 릴렉스토크 ]‘발라드의 원조’, ‘발라드의 왕자’ 변진섭이 돌아왔다. 트로트가 대중 가요의 중심을 이루던 시절, 20살 귀여운 외모와 미성을 자랑하는 청년은 발라드라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노래를 들고 대중 앞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발라드의 전성시대를 열어 젖혔다.

변진섭은 그리고 지난달 18일 미니앨범을 냈다. 어느 덧 마흔을 넘긴 나이에 두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그의 외모는 여전히 앳된 느낌을 풍겼고, 목소리 역시 곱고 섬세했다. 하지만 음악에는 원숙미가 느껴진다. 타이틀곡 ‘눈물이 쓰다’는 과거 그를 좋아했던 중년팬 뿐 아니라 까마득한 후배 가수인 휘성과 2AM 임슬옹조차 자신들의 트위터를 통해 극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다.
과연 그가 말하는 음악, '발라드'란 어떤 음악일까? 또 그리고 그가 앞으로 펼쳐나갈 음악세계는 또 어떤 것일까? 스포츠투데이는 25일, 26일, 29일 3회에 걸쳐 '발라드 원조' 변진섭을 연재한다. 연재에는 '변진섭과 발라드'와 '변진섭이 보는 발라드제왕들', 그리고 '변진섭의 꿈과 희망'이 소개된다. 싸늘한 초겨울의 날씨속에서 그의 품격만큼이나 따뜻한 '더 발라드' 콘서트를 준비중인 그의 새로운 희망가를 들어본다.(편집자주)


지금이야 대중적인 음악 장르로 자리 잡았지만,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발라드'는 일반 대중에게 생소한 단어였다. 그런 발라드를 한국 대중 음악계의 메이저 무대로 끌어올렸던 이가 바로 변진섭이다. 변진섭에게 발라드는 가장 사랑하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음악이었고, 가수로서 약관의 나이에 접어든 지금 발라드는 이제 곧 자기 자신이 되어 있었다.

“(이)문세형이 '난 아직 모르잖아요'를 발표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엔 아직 발라드라는 말이 없었어요. 트로트-비트로트로 나뉘던 시절이었죠. 굳이 더 세분화 한다면 댄스 정도? 물론 이전에도 슬로우 템포에 부드럽고 감미로운 연가 스타일의, 발라드로 불릴 만한 음악은 있었죠.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입에 오르내리는 단어는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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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제가 데뷔와 동시에 히트를 치고 갑자기 상승곡선을 타면서 상황이 바뀐거죠. 그전에는 발라드란 말도 없었고, 제가 일부러 언론 플레이를 한 것도 아닌데, 어느샌가 제게 '발라드의 왕자'라는 별명이 생겼고, 제 노래 스타일이 대세가 되면서 발라드라는 하나의 장르가 자리잡게 된 것 같아요”
변진섭의 센세이션함은 발라드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가수가 앨범을 내면 히트곡은 타이틀곡 하나에 머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처럼 후속곡이란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변진섭은 1집 타이틀곡인 '홀로 된다는 것' 외에도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너무 늦었잖아요', '새들처럼' 등이 동반 히트했고, 2집 역시 '희망사항', '너에게로 또다시', '숙녀에게',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거죠', '로라' 등 거의 모든 앨범 수록곡이 동시에 인기를 얻었다. 나름의 비결이 있었던걸까.

"8,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앨범이 나오면 타이틀곡만 듣는 성향이 강했어요. 그래서 가수나 제작자도 타이틀곡은 신경써서 만들지만, 나머지 곡은 정성을 쏟지 않는 경향이 있었죠. 물론 그 속에서도 조용필, 이문세, 송골매의 앨범은 전체를 훌륭한 곡으로 가득 채웠던 걸로 기억해요. 저도 거기에 영향을 받은 셈이죠."

더군다나 데뷔 전만 해도 변진섭은 '내 음반 한 장 갖는게 소원'이었던 신인에 불과했고, 첫 앨범이 처음이자 마지막 음반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변진섭은 "데뷔 앨범을 모두 보석같은 곡들로 채우고 싶었어요. 앨범의 처음부터 마지막 곡까지 모두 타이틀곡처럼 만들어 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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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대는 상상할 수 없는 얘기지만, 당시는 음반 말미에 꼭 군가나 공식적으로 발표된 건전가요를 수록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앨범 전체의 분위기와 연속성을 흐트러뜨리는 건 당연했다. 변진섭은 그 부분까지 놓치지 않았다. "동요 과수원길을 발라드 느낌으로 불러서 수록했어요. 덕분에 앨범의 전체적인 색깔에 통일감을 줄 수 있었죠."

죽을 때까지 후회없는 음반을 만들고 싶었던 그의 노력에 대중은 반응했다. 그것도 폭발적으로. 변진섭의 앨범은 그의 바램대로 데뷔 앨범은 '전 곡이 다 좋다'는 대중의 호평을 이끌어냈고, 덕분에 타이틀 곡이었던 '홀로 된다는 것' 뿐 아니라 여러 곡이 히트를 쳤다. 대성공이었다.

"그 때는 가수가 히트를 치면, 후속곡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어요. 앨범 하나에 무조건 히트곡 하나였죠. 아주 인기있는 가수 정도에는 두 곡 정도. 그러나 저는 히트곡이 많으니까 신인임에도 곧바로 콘서트를 가질 수 있을 정도였어요"

제대로 된 타이틀 곡 외에는 앨범 대부분을 '끼워팔기' 곡으로 채우던 시절, 하나의 앨범으로서 완성도가 높았던 변진섭의 음반은 대중 음악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특히 발라드라는 새로운 장르를 전면에 내세우고, 앨범 하나에서도 여러 곡을 동시에 히트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낸 변진섭은 가요계에 새바람을 몰고 왔다.

1집과 2집은 당시 가요계로서는 상상도 못할 소위 '대박'을 쳤다. 거의 모든 앨범 수록곡이 히트했을 뿐 아니라 2집의 '희망사항'은 무려 16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심지어 두 곡이 동시에 1위 후보로 경쟁하기도 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했던 인기였던 걸까.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얘긴데(웃음). 처음 1, 2회 콘서트를 각각 1989년, 1990년에 힐튼 호텔에서 했었어요. 공연 전날 리허설을 마치고 회사 측 배려로 호텔 스위트룸에서 잤는데, 창문에서 내려다보면 남대문을 중심으로 서울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었죠.

공연 당일 아침 일어나 무심코 창밖을 내다봤는데, 세상에. 내 공연을 보려는 팬들이 두 줄로 호텔부터 남대문까지 죽 늘어서있는 거에요. 소름이 확 돋더라구요. 나를 보려고 그 많은 팬들이 아침부터 그렇게 많이 왔는데, 순간 너무 무섭더라구요(웃음) '자고나니 스타가 됐다'는 말처럼 갑자기 너무 많은 인기를 받는게 부담스러웠죠. 만약 그때 누가 와주기만 한다면 창문으로 헬리콥터타고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니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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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무 심할 정도로 갑작스레 커진 인기였다.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버거울 정도로, 뿌듯한 느낌보다는 무언가 잘못된 건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정도로 그 시절 변진섭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변진섭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1990년, 이윽고 변진섭의 성공을 벤치마킹한 신승훈이 등장했다. 변진섭과 마찬가지로 발라드를 전면에 내세우고, 직접 작사,작곡까지 하며 앨범 전체의 질을 높였던 신승훈은 '보이지 않는 사랑'으로 15주 연속 1위를 하면서 가요계의 뜨거운 발라드 열풍의 바통을 이어 받았다. 물론 변진섭도 3집과 4집을 발매하며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단숨에 신승훈과 변진섭을 누르고 가요계 정상을 차지했다. 변진섭이 발라드를 들고 나왔을 때보다 더 큰 후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랩댄스가 대세를 장악했고, 발라드의 인기는 예전만 못한 채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변진섭은 "사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데뷔 초만 해도 지방 행사도 같이 다니고,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신인이었어요. 그러다 갑자기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랩댄스가 대세가 됐고, 하나의 문화로 정착한 거죠. 어떻게 보면 발라드가 밀린 셈이에요"

이후 댄스 음악의 인기는 듀스, R.ef 등 힙합과 레이브 댄스 음악을 거쳐 H.O.T와 젝스키스 등 아이돌 그룹으로 이어졌다. 그 속에서 발라드도 어느 정도 인기를 지켜나갔지만, 변진섭이 가요계를 호령하던 시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트렌드를 무시할 수 없었다. 많은 발라드 가수들이 앨범에 댄스 음악을 수록하기 시작했고, 신승훈조차도 타이틀곡은 발라드지만, '우연히', '처음 그 느낌처럼' 등 댄스 음악을 후속곡으로 발표했다. 심지어 '로미오와 줄리엣'에선 랩까지 시도했다.

모두가 변화를 받아들이는 시점에서 변진섭 역시 발라드 가수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진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여전히 발라드였다.

"요즘도 그렇지만 그때도 장르에 대세가 있으면 거스르기가 쉽지 않았어요. 앨범을 내기 전 기획 회의에서도 '요즘에는 랩댄스, 힙합이 유행이다'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대세인 장르의 음악을 약간씩 가미를 하거나 본격적으로 시도를 하죠. 하나의 트렌드를 쫓아갈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엄두가 안났어요. 너무 급변하는 느낌이었죠"

그때 당시에도 그는 '요즘에 댄스가 유행인데, 변진섭씨도 새로운 시도 해보고 싶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변진섭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나쁘게 말하면 굉장히 소극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내 하나의 색깔을 잡고 끝까지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말할 수 있어요"라고 털어놨다.

변진섭 스타일의 발라드를 고수하고 싶었다는 뜻이다. 지루해 보일 수는 있었겠지만, 발라드 가수로서 자신의 스타일을 지키고 싶었다. "제가 데뷔 때부터 얻은 별명이 '발라드의 왕자', '발라드의 황제'였고 이후에는 '발라드의 원조, 혹은 전설'이었어요.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죠."

데뷔한 지 어느덧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새 앨범을 준비할 때마다 기존의 음악 색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발라드가 아니면 내 스스로 좀 어색해요. (웃음) 그렇게 고집을 하다보니 솔직히 예전만큼 인기를 끌진 못했고, 중앙 무대에서도 서서히 멀어져갔죠. 물론 나는 멀어진다고 생각 안 하는데 대중에게선 잊혀지는 느낌이었어요."

"세상이, 가요계가 돌아가는 과정에서 내가 변화를 잘 캐치하지 못 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변진섭이 시대의 흐름을 좇지 않고, 끝까지 발라드를 고수했기 때문에 그에겐 다른 가수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발라드 가수의 내공이 쌓였고, 변진섭 자신 역시 '발라드의 원조'라는 말을 듣기에 충분한 존재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오는 12월 4,5일 콘서트 '더 발라드'를 준비중이다. 과연 어떤 음악을 펼칠까?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수많은 가수들. 그중에서도 발라드황제라 아로새겨진 많은 가수들의 이야기를 펼쳐볼 생각이다.
26일 아침 ②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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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투데이 황용희 기자 hee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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