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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바이러스 퍼뜨리는 '어르신 영화관' 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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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강경훈 기자] 머리가 희끗한 노인들이 삼삼오오 극장으로 모여든다. 오늘의 상영작은 신성일, 윤석화 주연의 '레테의 연가'(1987년 작). 내부를 둘러보니 난데없는 추억의 'DJ 박스'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서울 낙원동 옛 허리우드극장이다. 지금은 노인전용극장이란 뜻의 '실버영화관' 팻말을 달고 있다.

허리우드극장은 원래 내노라하는 유명 개봉관이었지만 수 년 전부터 주변 대형극장에 밀려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 지난해 초 노인들을 위한 전문영화관으로 탈바꿈 했다.
그 간 주로 어떤 영화가 상영됐는지 리스트를 '입수'해 봤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빙점', '벤허' 등이 눈에 띈다. 여타 극장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영화들인지라 노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지난해 문을 열고 1년 만에 관객 수 '12만 명'을 돌파했다. 유명 멀티플렉스 극장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나름 의미 있는 숫자다.

극장 대표인 김은주 씨는 어떤 계기로 이 사업을 시작했을까. 그 사연을 들으려면 주소지를 종로구 낙원동에서 서대문구 미근동으로 잠시 옮겨야 한다. 미근동에는 화양극장(현 드림시네마)이 있다. 화양극장은 2007년 더티댄싱(1987년 작)을 재상영해 화제를 모았다. 화양극장 대표는 김은주 대표의 부친이다.

"옛 영화에 큰 관심을 보이는 중장년층의 모습을 보고, '이 분들도 문화를 향유하고 싶은 욕구가 있구나'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지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실버영화관 운영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실버영화관은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문화공간이다. 옛 영화만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극장은 많겠으나, 아예 노인만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진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해도 무방하다.

실버영화관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말에는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문제는 경영이다. 애초 돈 벌자고 시작한 사업은 아니라 해도 지난해 적자만 3억 5천여 만 원이란 소리에 걱정이 앞선다.

김 대표는 노인들에게 입장료로 2000원을 받는다. 주전부리 하시라며 나눠 드리는 국화빵 2개는 '서비스'다. 부담 없는 가격에 이곳을 즐겨 찾는다는 노인들은 "이런 공간이 사라지면 안 된다"며 '웃돈'을 주려하지만, 김은주 대표는 극구 사양한다. 매주 극장을 찾는다는 한 어르신은 "공짜로 국화빵 먹기 미안하다"며 1000원을 기어이 내고 가기도 했다.

훈훈하지만 다소 '궁핍'한 실버영화관의 사연이 조금씩 알려지며, 이곳저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찾아온 것은 반가운 일이다. 아직 우리네 인심이 어르신들을 외면할 만큼 각박하지는 않기 때문일까.

지난해 노동부는 실버영화관을 '사회적 기업'으로 인정했고, 중소기업진흥공단도 자금 대출에 도움을 주겠다고 연락해왔다. 무엇보다 기쁜 소식은 기업들의 후원 결정이다. 현재 SK케미칼이 1억 2000만원을 해마다 지원하고 있고 유한킴벌리도 연간 5000만 원을 후원하고 있다. 두 기업으로부터 받는 후원금으로 극장 살림 30% 정도가 유지된다.

김 대표는 "우리 지방에도 극장을 세워달라는 요청이 끊임없이 들어오지만 솔직히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라며 "SK케미칼 측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고 회사도 적극적인 의사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SK케미칼에 '부담감(?)' 좀 주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단순 후원 그 이상이 아니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정말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방 후원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행복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는 김 대표의 유쾌한 실험 그리고 우리 주변의 따뜻한 관심이 흐뭇하다. 객석에 앉아 한 입 베어 문 누런색 국화빵에는 멀티플렉스 극장의 하얀 팝콘보다 달콤한 맛이 났다.



강경훈 기자 kw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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