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작은 딸이 친구랑 저녁에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말에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중학생이 친구랑 카페에서 만난다고? 그것도 저녁시간에? 저도 모르게 어디서 만나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응, 8시, 다음 카페에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이버 공간의 카페를 저는 순간적으로 현실 공간의 카페로 착각한 거지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며 맺는 관계도 정리할 줄 몰라 쩔쩔매고, 기껏해야 이메일만 사용하는 저로서는 사이버 세상에서 인간의 네트워크를 만든다는 것은 엄두도 못내는 일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사이트의 주인이 ‘친구삭제하기’ 혹은 ‘일촌끊기’ 항목을 상대방과 의논도 없이 클릭함으로써 둘의 관계는 끝이납니다. 어느 날 나는 내가 여전히 그 친구의 일촌이라 생각하고 접속했는데 그 친구가 나를 ‘unfriend’시켰기에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는 상황이 생기게 됩니다. ‘엄마, 수영 끊어줘, 학습지 끊어줘, 태권도 끊어줘…’라며 늘 엄마한테 조르던 아이들이 사이버 세상에서는 자신의 의지로 마구 친구를 끊어버리는가 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친구 목록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삭제 당해서 한마디 변명도 할 수 없고 가까이 갈 수도 없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인간의 만남과 헤어짐이 클릭 한 번으로 쉽게 될 수 있는 일인가요?
저는 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여러 겹으로 싸여있는 양파를 떠올립니다. 양파의 가운데에 제 자신이 있는 것이지요. 가장 가까운 껍질에 있는 사람들, 두 번째 껍질에 있는 사람들, 다섯 번째 껍질에 있는 사람들… 나는 그 친구를 세 번째 껍질에 두었는데 그 친구는 나를 첫 번째 껍질에 두었다면 서로의 기대가 어긋나 힘들어집니다. 비슷한 순위에 두도록 같이 노력해야 오랫동안 만날 수 있게 되겠지요.
어떤 분이 나의 휴대폰에서 떠나감으로 세월이 지나면 나에게서 잊혀지는 사람이 되고, 나 또한 어떤 분에게서 ‘친구 삭제’됨으로 인해 잊혀진 여인이 되겠구나 생각합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여류 시인이자 화가였던 마리 로랑생의 시를 떠올립니다.
권태로운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슬픔에 젖은 여인입니다.
슬픔에 젖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불행을 겪고 있는 여인입니다.
불행을 겪고 있는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병을 앓는 여인입니다.
병을 앓는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버림받은 여인입니다.
버림받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쫓겨난 여인입니다.
쫓겨난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죽은 여인입니다.
죽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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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금 토포하우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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