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시민군 이강하 작가의 아내 이정덕 관장
계엄군 국회침탈 보며 트라우마 속에 살다 간 남편 떠올라
"이 땅에 비극 반복돼선 안돼…금남로 광장·탄핵 집회 현장 찾아"
남편이 소망했던 정의 완성…5·18 헌법 수록때까지 계속 할 것

편집자주1980년 5월 광주는 계엄군의 군홧발에 외롭게 짓밟혔으나, 2024년 12월 3일의 대한민국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반헌법적 비상계엄 선포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무장한 계엄군의 총칼 앞을 가로막은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닌, '5·18의 기억'을 가슴에 품은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부모 세대가 피로 일궈낸 민주주의를 자녀 세대에게는 온전히 물려주겠다는 그 사명감이 국회의 문을 닫아걸었고, 끝내 계엄군을 되돌려 세우는 실효적 동력이 됐다. 하지만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을 골자로 한 이번 개헌안은 국민의힘의 대거 불참에 따른 '투표 불성립'으로 인해 39년 만에 허망하게 무산됐다. 현장에서 몸을 던져 계엄을 막아냈던 민초들의 희생을 정치가 정면으로 배신한 셈이다. 본보는 3회에 걸친 기획 시리즈를 통해 12·3 새벽 사투의 주역들과 탄핵 국면에서 활동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내 안의 5·18'을 기록한다.

"남편을 걷어찼던 그 군홧발, 시민을 향해 들이댔던 그 총구가 서울 한복판에 다시 나타난 걸 보며 온몸이 떨렸습니다. 평생을 트라우마 속에 살다 간 남편을 생각하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광주 양림동, 고즈넉한 골목 끝에 자리한 이강하미술관. 이곳을 지키는 이정덕 관장(오월어머니집 사무총장)은 지난 12월 3일의 기억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남편인 고(故) 이강하 작가(1953~2008)를 떠나보낸 지 18년이 흘렀지만, 그날 밤 TV 화면 속 국회를 침탈했던 무장 군인들의 모습은 남편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갔던 1980년 5월의 악몽을 생생하게 소환했다.

지난 11일 광주 남구 양림동 이강하미술관에서 이정덕 관장이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정신과 12·3 비상계엄 사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민현기 기자

지난 11일 광주 남구 양림동 이강하미술관에서 이정덕 관장이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정신과 12·3 비상계엄 사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민현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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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생 이강하의 '아! 광주'… 붓 대신 소총을, 예술 대신 옥고를

1980년 5월, 조선대학교 미술교육과 1학년이던 평범한 청년 이강하는 계엄군에게 구타당하는 시민들을 목격하고 분연히 일어섰다. 그는 시민군에 합류해 항쟁에 사용할 걸개그림을 그리고 총을 들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상무대에서 우측 팔을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로 모진 고문을 당했고, 석방 후에도 2년간 지명수배를 피해 도망 다녀야 했다.

이 관장은 "남편은 늘 '내가 그냥 나만 편하자고 못 본 척해야 했나'라며 젊은 시절의 선택을 곱씹곤 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5·18은 '폭도'라는 낙인이 되어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미술 교사 임용은 신원조회 문턱에서 좌절됐고, 여행지에서도 수배 이력 때문에 유치장에 갇히기 일쑤였다. 딸에게는 "누가 폭도 이강하 자식이냐고 물으면 도망가라"고 가르쳐야 했던 아픈 세월이었다.


이 작가는 평생 그날의 후유증과 '폭도'라 불리는 사회적 시선에 시달렸다. 경제적 고통 속에서도 7개 도시 순회전을 열며 오월의 한과 통일의 염원을 화폭에 담았으나, 무리한 활동과 스트레스는 결국 병마가 되어 돌아왔다. 2003년 시골 폐교로 내려가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우려던 그는 암 투병 끝에 2008년 끝내 눈을 감았다.

12·3 계엄 선포가 깨운 트라우마… "남편의 이름으로 광장에 서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15년 만인 2023년 12월, 이 작가는 재심을 통해 43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그의 행위가 "헌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다고 명시했다. 비로소 '폭도'의 멍에를 벗은 듯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인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이 관장에게 벼락처럼 내리쳤다.

"남편은 살아생전 트라우마 때문인지 그날의 이야기를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공포스러운 계엄군이 다시 나타난 거예요. 또 누군가 폭도로 몰려 끌려가고 인생이 망가질까 봐 노심초사해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 관장은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임한 뒤 오월어머니집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며 조용히 남편의 예술 세계를 알려왔지만, 그날만큼은 신발 끈을 조여 맸다. 평생 숨어 지내며 고통받았던 남편을 대신해, 그리고 다시는 이 땅에 그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하겠다는 사명감으로 광주 금남로 광장과 탄핵 집회 현장으로 나섰다. 5·18 정신이 70대 여교사 출신 미망인을 투사로 만든 순간이었다.

고(故) 이강하 작가가 직접 썼던 조서의 내용. 민현기 기자

고(故) 이강하 작가가 직접 썼던 조서의 내용. 민현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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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은 막았지만… 정치가 배신한 '5·18 헌법 전문 수록'

광주의 사투는 헛되지 않았다. 12·3 계엄은 3시간 만에 막을 내렸고, 이는 1980년 광주가 피로 지켜낸 민주주의의 저력이 2024년 서울에서도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가 탄핵소추안 상정 당시 "한국 민주주의는 광주에 빚졌다"고 한 연설은 광장에 모인 수많은 시민의 눈시울을 적셨다.


하지만 이 관장의 울분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해 민주주의의 근간으로 삼으려던 개헌안이 지난 9일 국민의힘의 조직적 투표 거부로 무산됐기 때문이다. 39년 만에 찾아온 역사적 기회는 그렇게 허망하게 날아갔다.


"남편이 생전에 남긴 노트에 '폭도라는 그 공포스러운 눈빛만 거둬줬으면 좋겠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헌법 전문 수록은 남편 같은 수많은 희생자가 비로소 국가로부터 온전한 명예를 회복 받는 길이자, 민주주의의 완전한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정치가 이를 배신했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부모로 남는 길, 오직 헌법 수록뿐"

이 관장은 여전히 미술관을 지키며 남편의 작품 '아! 광주' 앞에 선다. 헬기가 뜨고 군인들이 총을 든 화폭 속 풍경은 46년 전 광주이자, 며칠 전 서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는 헌법 전문 수록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해 목소리를 높이며, 정치권이 외면한 시대적 과제를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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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용감하지는 못했지만, 정의를 찾아가던 그 이야기가 내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들려주길 원했던 남편의 소망을 기억합니다. 5·18 정신이 헌법에 새겨지는 그 날까지 저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것이 남편이 화폭에 담으려 했던 진정한 민주주의의 완성이니까요."


호남취재본부 민현기 기자 hyunk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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