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파격적 해체 vs 정공법 택한 '복원'
기성세대 향수 자극 넘어, '잘파세대' 노려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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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고전들이 극장에서 격돌한다. 영문학사에서 강렬한 비극으로 꼽히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프랑스 대문호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다. 스크린으로 옮겨진 작품들은 각각 파격적인 해체와 압도적인 정공법을 무기로 삼아 고전의 생명력을 다시금 증명해 보인다.


11일 개봉한 미국 영화 '폭풍의 언덕'은 1847년 빅토리아 시대의 엄숙주의를 뒤흔들었던 원작의 파격을 현대적 감각으로 되살렸다. 브론테는 사랑 뒤에 숨은 광기와 증오를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프라미싱 영 우먼(2021)'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거머쥔 에메랄드 페넬 감독은 이 불온한 에너지를 가져오되, 화법은 완전히 비틀었다. 고전의 엄숙함을 걷어내고, 도발적인 미장센을 채워 넣었다.

황량한 요크셔의 외딴 저택, 캐시(마고 로비)와 히스클리프(제이콥 엘로디)의 비극은 매끈한 화보처럼 변주됐다. 페넬 감독은 이들의 맹목적 정념을 공간의 물성(物性)으로 시각화하는 실험을 감행했다. 특히 마고 로비의 피부 질감을 본뜬 라텍스 벽면이나 머리카락을 엮은 듯한 기괴한 장식은 아름다움과 불쾌함의 경계를 허문다. 원작의 처절한 깊이가 단순한 이미지의 나열로 휘발됐다는 지적이 있지만, 고전의 파괴적 본능을 현대적 맥시멀리즘으로 되살렸다는 평가 역시 유효하다.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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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심연을 파고들어 논란을 자처한 '폭풍의 언덕'과 달리, 13일 관객을 찾는 프랑스 영화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서사의 힘을 극대화하는 정공법을 택했다. 억울한 옥살이와 탈출, 그리고 처절한 심판이라는 복수극의 원형을 완성한 뒤마의 걸작을 탁월하게 형상화했다. 방대한 내용을 러닝타임 178분에 밀도 있게 압축하면서도, 원작의 품격을 훼손하지 않는 모범 답안을 제시했다.

그동안 나온 '몬테크리스토 백작'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은 제작비(약 640억원)를 투입해 19세기의 낭만과 비장미를 구현했고, 속도감 있는 전개로 현대적 장르 쾌감까지 확보했다. 주연한 피에르 니네이 또한 순수한 청년에서 냉혹한 심판자로 변모하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며 활자 속에 갇혀 있던 복수의 화신을 깨워냈다.


이러한 고전의 귀환은 우연이 아니다. 최근 영미권과 유럽에서 고전 문학 다시 읽기 열풍이 불면서, 영화계가 이를 새로운 흥행 코드로 포착했다. 영미권 출판계 통계에 따르면, 지난 2년간 고전 소설 판매량은 고풍스럽고 지적인 분위기를 동경하는 '다크 아카데미아(Dark Academia)' 트렌드와 맞물려 꾸준한 상승세를 보인다. 국내 극장에서도 기성세대의 향수 자극을 넘어, 레트로 문화에 심취한 2030 '잘파세대(Z+Alpha)'를 불러들일 기폭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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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몬테크리스토 백작'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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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이 트렌드에 화답하는 두 작품의 방식이 극명하게 엇갈린다는 것이다. 하나는 원작을 과감히 해체해 이슈를 만들었고, 다른 하나는 원작의 무게감을 거대한 스펙터클로 승화시켜 장르적 완성을 이뤘다. 고전을 대하는 할리우드와 유럽의 시각차를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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