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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테크노 봉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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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테크노 봉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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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중세 봉건시대는 ‘등자’의 유입과 함께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등자는 말 안장에 달린 발걸이다. 사소한 삼각형 금속에 불과하지만 8세기 유럽에 소개되면서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분수령이 됐다.


가장 큰 변화는 전쟁의 형태였다. 그 이전까지 기마병은 안정적인 자세로 말을 탈 수가 없었다. 고정장치가 없어 달리는 말 위에서 칼이나 창을 휘두르는 것 자체가 위험했기 때문이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다리로 말의 몸통을 조여야 했는데, 적과 싸워야 하는 기병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병을 양성하는 것 자체가 난제였다.

하지만 등자가 말안장에 장착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싸움에서 기동력이 생겼고 기병의 역할 역시 커졌다. 유럽이 북쪽 바이킹 침략을 막아낸 것도 등자가 활용됐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기병의 성장은 영주와 기사의 공생관계를 가능케 했다. 이는 봉건시대의 서막이다. 기사가 영주를 지키고, 영주는 기사에게 토지를 제공하는 봉건시대의 토대가 이때 만들어졌다. 영주들은 교회 땅을 사들여 기사들을 양성했고 기사들은 생명과도 같은 말들을 키우고 훈련시켜 영주들을 지킨 것이다.


봉건시대를 언급한 건 최근 들어 서구에서 회자되고 있는 소위 ‘테크노 봉건주의’ 때문이다. 알파고로 유명한 ‘딥마인드’ 공동 창업자인 무스타파 술레이만은 자신의 저서 ‘더 커밍 웨이브’에서 기술의 작은 변화가 과거의 봉건주의를 재현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테크노 봉건주의가 오고 있다’고 표현했다. 물론 이 표현을 처음 만든 건 그리스 학자이지만 서구권 전반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이런 표현이 유행을 타기 시작한 건 기술을 바탕으로 한 거대 IT 기업들이 구축한 생태계가 중세시대 봉건제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아마존이 구축한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구독료를 내고 애플이 만든 앱스토어에서 필요한 애플리케이션(앱)을 다운받는다. 지대를 받는 대신 안정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과거 영주와 기사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최근 우리 IT 업계는 플랫폼법으로 몸살을 앓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독점적 지위를 가진 플랫폼 기업을 지배적 사업자로 사전 지정하고, 4가지 반칙행위 금지 등을 적용하겠다고 했다가 업계의 반발이 나타나자 사실상 철회했다. 이미 구축된 생태계를 제도를 통해 인위적으로 무너뜨리려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업계 전체가 들고일어난 결과다.


테크노 봉건시대는 돌이킬 수 없는 현상이 됐다.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된 것이다. 기업이든 소비자든 이젠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가 제공하는 안정적인 생태계에서 수수료만 내면 안정적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 반대급부로 경쟁이 줄어들고, 혁신 또한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부인할 순 없다.


하지만 이런 우려 때문에 시장 논리를 거스를 수 없다는 점도 명백하다. 빅테크의 생태계도 그들끼리의 경쟁을 붙여 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히려 소비자와 기업들의 선택지를 넓혀주는 게 정부 당국이 해야 할 일이다.


술레이만 딥마인드 공동창업자는 "기술의 작은 변화가 기본적으로 향후 수십년간 권력의 균형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봉건주의를 허문 르네상스가 정책이 아닌 자생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최일권 기자 ig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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