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대생 조카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수강 신청을 남들보다 0.5초 앞서려고 서버 시간을 알려주는 네이비즘을 썼다. 취업에 유리하다며 1학년 2학기에 학교 취업준비처에 가서 진로 검사를 했다. 방학 때는 카페 아르바이트와 어학원을 병행했고, 복수전공을 하면서도 평균 학점은 A- 수준.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도 손에 쥐었다. 그뿐인가. 팀플, 공모전, 대외활동 등으로 꽉 찬 대학 생활 4년을 보냈다. 취업 결과는? 19전 19패. 아직 ‘취준’ 중이다.


[K우먼톡]내 딸이 '모르는 회사'를 알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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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준생들의 흔한 사연을 복기해보자. 무엇이 부족했던 걸까. 취업전문가의 진단을 종합해보면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취업을 대입처럼 생각했다. 대입은 내신과 수능 점수를 들고 입시 전문기관이 만든 배치표에 맞춰 지원하는 구조다. 전국에는 336개 대학만 존재하며 성적에 맞는 대학에 가면 된다. A대학과 B대학 경영학의 차별점을 파악해서 지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취업은 어떤가. 공통의 시험이 없고 당연히 기업을 서열화한 배치표가 없다. 무엇보다 전국에는 700만개의 기업이 있다. 대기업만 9000여개, 중견기업도 5000개가 넘는다. 일렬이 아니라 수많은 줄이 존재하고, 각 줄마다 차별점이 뚜렷해 요구하는 역량과 특성이 다르다. 스스로 기업 배치표를 만들고 어떤 줄에 서야 할지 정한 뒤 기준을 맞춰야 하는데 조카는 입시처럼 점수부터 만들었다.


두 번째는 무조건 길고 사람 많은 줄에 선 점이다. 조카의 지원 리스트에는 ‘누구나 알 만한 기업’이 담겨있었다. 대기업, 외국계 기업, 중견기업에 골고루 원서를 썼다고는 하나 모두 많이 들어본 기업이었다. 당연히 경쟁자가 넘쳐났다. 잘 알려진 소비재 기업은 수많은 지원자를 평가하느라 영상 자기소개서, 롤플레잉, 개별 PT 등 난도 높은 전형을 채택했다. 이러니 취준 난도만 올라갈 뿐 합격 기회는 오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우리나라에는 중견 규모 이상의 기업이 1만4000여개, 상장기업도 2500여개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중 겨우 100개 기업 이름 정도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조카도 취업 포털의 수많은 공고 중에서 ‘모르는 기업’은 패스했다. 조카가 거른 기업 중에는 글로벌 시가총액 기준 100대 기업, 미국 빅3 바이오 기업도 있었고, 투자자들 사이에서 촉망받는 유망한 스타트업도 있었다. 모르고 거른 기업의 연봉, 워라밸, 복지, 성장성이 지원한 기업보다 훨씬 좋고 취업 난도도 낮았는데 조카는 우물 안에서 피 터지는 개구리 싸움을 했다.


TV 광고를 많이 하는 식품, 제약회사는 IT나 화학 업종보다 연봉이나 복지 수준이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외국계 기업도 마찬가지. 유명한 명품 기업의 평균 연봉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자동차부품 회사에 비해 적은 경우가 많은데 경쟁률은 턱없이 높다. 독일에 본사를 둔 한 글로벌 기업의 인사담당자는 "회사 이름이 길고 어려워서 지원자가 적었는데 포천 100대 반도체 장비 기업이라는 부제를 넣자 지원자가 대폭 늘었다"고 말했다. 우리의 기업 지식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조카가 20전 도전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열심히’를 잠시 멈추고, 먼저 어떤 줄에 서야 할지를 탐색해야 한다. 그다음으로는 크고 강한데 아직은 한산한 줄, 옆자리 친구가 아직은 모르는 기업의 리스트를 만들어 도전해야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알짜 기업은 우리가 아는 기업보다 몇십 배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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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은 이씨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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