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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영화 속 의상, 캐릭터를 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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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 시스템 도입하고 전문성 주입한 김유선 의상감독
'살인의 추억'·'정직한 후보'·'와니와 준하' 등 예순 편 참여
단순 고증 넘어선 캐릭터의 완성…문체부 장관 표창 받아
"독립적 영상 언어 인정받아 기뻐…전문 분야로 거듭나길"

[라임라이트]영화 속 의상, 캐릭터를 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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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2003)’은 희대의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다. 어느 논두렁 배수구에서 무참히 살해된 여자 시체가 발견된다. 비슷한 수법의 사건이 계속 일어나자 일대에 특별수사본부가 마련된다. 박두만(송강호), 조용구(김뢰하) 등 지역 토박이 형사들과 서울 시경에서 자원해온 서태윤(김상경) 형사가 사건을 맡는다. 박두만은 육감과 몸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한다. 과학 수사를 표방하는 서태윤과 사사건건 부딪친다. 애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으면서 수사는 공전을 거듭한다. 박두만의 육감과 서태윤의 논리가 맞아떨어져도 마찬가지다. 이렇다 할 단서를 잡지 못해 유력한 용의자 박현규(박해일)를 놓아준다.


서늘한 영화의 배경은 1980년대 농촌이다. 김유선 의상감독은 진실한 이미지로 사실주의를 수놓았다. 손뜨개 니트, 넓은 칼라와 벨트, 여성의 패드 넣은 어깨, 미디 길이의 치마, 복고적인 무늬, 짧은 바지 길이 등 당시 복장의 특징을 그대로 살렸다. 원색을 선호하던 경향은 제한적으로 반영했다. 자칫 영화의 분위기를 해칠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주요 배역들이 입은 의상에 주로 농촌과 소도시의 배경에 묻힐 듯한 중간 톤의 어두운색을 사용했다. 원색은 주변 배역들을 통해 조금만 드러냈다. 대신 명도가 같은 다른 색상의 배색이나 낮은 채도의 색을 사용해 두드러질 여지를 최소화했다. ‘살인의 추억’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톤을 유지하면서 무채색 톤에서 명도의 대비를 효과적으로 끌어낸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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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의상의 역할은 고증을 통한 복원이나 분위기 조성에 머물지 않는다. 무엇보다 배역을 완성하는 시각 예술이자 독립적인 영상 언어로 기능한다. 캐릭터의 외형을 형성하며 내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거나 함축한다. 의상의 색, 스타일, 차림새 등 세부적 디자인 요소들이 등장인물을 비로소 배역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전문성을 요구하는 작업이지만 1990년대까지 국내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배우들이 직접 의상을 준비하거나 협찬받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김유선 의상감독은 미개척 분야나 다름없던 영화 의상 분야에 선진 시스템을 도입하고 전문성을 주입했다. ‘세상 밖으로(1993)’를 통해 영화계에 입문해 약 예순 편의 의상을 책임졌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2008)’, ‘핸드폰(2009)’, ‘분홍신(2005)’, ‘와니와 준하(2001)’, ‘오! 수정(2000)’, ‘카트(2014)’, ‘정직한 후보(2019)’ 등이다. 뚜렷한 목적과 방향의 디자인으로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어 지난 3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한 대중문화예술 제작스태프 대상에서 문체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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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의상감독은 "영화 의상이 하나의 전문 분야로 인정받은 것 같아 감개무량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의상 전공자라면 도전해 볼 만한 매력적인 직업"이라며 "영화라는 매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 존재할 것이며 그와 함께 발전할 것임이 틀림없다. 한국 영화가 발전을 거듭한다면 분명 할리우드의 영화 의상감독들처럼 독자적인 전문 분야의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30년 가까운 의상 세계는 ‘살인의 추억’으로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았다. 의상 실루엣과 색채, 소재 등으로 박두만과 서태윤의 분명한 대조를 표현한 점이 높게 평가됐다. 박두만은 몸에 꼭 끼는 셔츠에 누리끼리 촌스러운 시골 점퍼를 착용한다. 형사로서 자질을 검증받지 않은 경찰의 표면화다. 동네 주변 인물들을 탐문 수사해 육감을 발휘하려는 성격은 허리선이 높이 올라간 형사들의 전형적인 정장 바지와 흰색 프로월드컵 운동화 등에서 감지된다. 무늬가 다른 여러 벌의 셔츠로 나름 멋을 부리지만 그다지 감각적이진 않다. 단 애인이 있어 깔끔함은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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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윤의 의상은 정반대다. 시골 경찰서의 분위기를 환기할 만한 신선한 느낌으로 가득하다. 남방은 밝은 톤의 와이셔츠형이고, 캐주얼 재킷은 면 소재의 사파리 형태다. 면바지에 고급 운동화로 멋도 부린다. 세련되거나 깔끔한 느낌까지는 아니지만 단정하다. 지적이고 꼼꼼한 성격을 대번에 알려준다. 전체적인 의상은 수사가 미궁으로 빠질수록 조금씩 흐트러진다. 냉소적이던 그가 이성을 잃는 과정을 섬세하게 가리킨다.


김 의상감독은 "제작진의 능력을 반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감독이 있다면 봉준호 감독은 정반대였다. 내가 디자인을 더 하고 싶게 만들었다"며 "여우 같은 구석이 있다"고 말했다. "제작 전까지는 ‘1980년대 농촌 배경의 스릴러 영화에서 의상에 신경을 쓸 게 뭐 있어?’라는 생각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디자인 콘셉트를 치밀하게 고민해서 의상을 만들었고, 그 결과 ‘살인의 추억’ 의상이 한국 영화에서 스릴러 형사물의 기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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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2008)’에서 형사인 엄중호(김윤석)의 셔츠는 박두만이 입었던 그것과 유사하다. 전반적으로 톤 앤드 매너가 유사한 영화들의 기준이 된 셈이다. ‘살인의 추억’ 속 마지막 용의자인 박현규의 의상도 다르지 않다. 김 의상감독은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스타일로 꾸미면서도 다른 인물들과 디테일에서 차별화를 꾀했다. 비교적 밝은 톤으로 깔끔한 인상을 표현했는데 지나치게 깨끗함을 강조해 서늘한 느낌이 난다. 상의도 디테일이 별로 없는 목을 감싸는 고운 느낌의 폴라티와 단정한 남방이다. 실체가 보이지 않을 만큼 자욱한 아침 안개와 어우러져 불안감과 우울감을 조성한다. 가히 장인이 빚어낸 현대적인 예술이라 할 만하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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