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현정 기자] 지구촌(Global village),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던 때가 있었다. 신자유주의 경제이념의 확산과 적극적인 문호개방으로 지구인 모두가 손을 잡은 듯 한 감각을 느끼던 1990년대. 푸른 지구 위에 각국 전통의상을 입고 미소 지으며 강강술래 대형으로 사람들이 모여있는 풍경은, 한 때 도처에 그림이며 포스터로 붙어있었다.
세계화는 실재했다. 기술의 발전으로 유무선 연결망을 통해 전 세계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빠르게 교류했고, 상호 의존했다. 이제는 지름 1만2800㎞의 거대 행성 반대편에 살고 있는 사람의 소식을 옆집 사람 소식 보다 빠르고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메타버스와 같은 가상세계에서 이뤄지는 국경을 초월한 사회·문화적 활동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지구촌은 실재할까. 전 지구가 마치 하나의 마을 공동체와 같다는 이 개념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70일을 지나는 오늘, 우스갯소리처럼 느껴진다. 전쟁의 전개 양상은 공동체는 커녕 국가와 민족, 대륙간의 더욱 견고한 경계와 단절을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오래전부터 예견해온 것으로 유명한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현실주의 국제관계 이론을 통해 지구촌의 허상과 실제를 거듭 강조해왔다. 그가 말하는 국제체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서열없음, 정부없음, 다시 말해 아나키(anarchy). 우리가 실제로 지금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크라이나에서 민간인 수천명이 러시아의 공격에 사망했지만, 재빨리 나서 이 상황을 정리해줄 상급기관은 없다. 전쟁을 말려줄 상위체제로 국제연합(UN), 세계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 같은 국제기구를 떠올리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전쟁이 길어질수록 매일 같이 쏟아지는 참혹한 민간인 학살 현장에 무뎌지고 있다는 걸 부인하기 힘들다. 당장 우리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가 살인과 폭력을 일삼아 충격을 줬던 미얀마의 오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이 곳에서는 여전히 1년 넘게 학살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 국민의 의식과 수준을 대변하는 국회의원 대다수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화상연설 현장에 조차 가지 않았다. 세계와 대한민국은 기술적으로만 시공을 초월해 연결돼 있을 뿐, 공동체라는 의식은 오히려 멀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1986년생 우크라이나의 그림책 작가 올가 그레벤니크가 전쟁의 참상을 짧은 글과 그림으로 펴낸 ‘전쟁일기’라는 책이 최근 국내에 출간됐다. 9살, 4살된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그녀가 하루아침에 난민이 돼 겪어야 했던 일상을 다룬 책이다. 쓰여진 마지막 일기는 3월 12일이고, 이 책은 지난달 7일 세상에(한국에 처음으로) 나왔다. 동유럽 국가의 현재진행형 참사가 한 달만에 한 권의 책이 되어 대한민국 우리집 현관 앞까지 배송되는 것을 보면 세계가 여전히 긴밀히 연결돼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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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낸 출판사 이야기장수의 이연실 대표는 통상 두 달이 걸리는 원고 입수, 편집, 디자인을 보름만에 서둘러 마쳤다고 한다. 책의 번역료 전액과 수익 일부는 우크라이나 적십자에 기부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이 책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직접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보살피려는 마음 씀씀이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구촌 공동체의 감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미련의 증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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