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라. 병아리 정치부 기자 시절 선배들이 가르쳐준 첫 계명이다. 상대가 하는 말을 제대로 받아 적는 게 기자의 기본이다. 나중에 취재수첩을 읽어보면 여러 경우가 생긴다. 그대로 기사로 옮겨도 될 정도의 언급. 고인이 된 이춘구 전 의원이 그랬다. 외모는 저승사자처럼 비치지만 의외로 따뜻하고 논리적이었다. 대다수 정치인들은 모호하게 말한다. 빠져나갈 구석을 만든다.
녹음하라. 요즘 기자들에게는 휴대폰이 취재노트다. 녹음 버튼만 누르면 된다. 이제는 기자 사회에서도, 정치권에서도 녹취가 일상적으로 이뤄진다. 예전에는 녹취록 공개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몰래 녹음 혹은 권력기관의 도청록이다. 녹취록은 정치 대립이 막장으로 치달을 때 폭로 형식으로 나왔다.
정치부 데스크 시절, 후배 기자가 송사에 휘말렸다. 어떤 유력 정치인의 얘기를 듣고 기사를 썼다. 물의를 빚자 오리발을 내밀었다. 증거는 꼼꼼히 적힌 취재노트. 판사는 알고 있었다, 정치인이 말해놓고 발뺌하는 것을. 적당한 선에서 소송은 취하됐다. 시간이 흐른 뒤 정치인은 신문사에 미안하다는 뜻을 전해왔다.
정치는 여백의 예술이다. 선문답 속에서 타협과 절충이 이뤄진다. 정치 기사도 마찬가지. 큰 방향성이 중요했다. 단어 하나하나를 놓고 다투지 않았다. 얼마 전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윤석열 후보 측과 대립하면서 녹취록이 몇 차례 까졌다. 정치 실종이다. 대다수 언론도, 유권자들도 본질은 관심 밖이다. 몇 마디를 놓고 설왕설래에 모두들 지쳐간다. 여야 대변인단의 논평 역시 말꼬리 잡기의 연속이다.
어차피 몰이해의 시대다. 본류와 상관없으면 묻어주던 시대는 지나갔다. 뉴미디어 발달, 다양해진 언론. 대권을 목표로 한다면 이제는 어투 하나, 몸짓 하나 신경 써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격언이 한층 무겁게 들린다.
요즘 젊은 정치부 기자들을 만나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예전 선배들보다 취재원과의 밀접도는 떨어졌다. 그럼에도 감각적인 분석력은 뛰어나다. 일반 유권자들도 그렇다. 정치를 향한 관심과 냉정한 질책이 만만치 않다.
그래도 아쉽다. 수십 년 정치부 기자로 지면을 통해 정책 선거를 그리 외쳤는데. 현실은 점점 멀어져 간다. 재미를 우선시하는 대중. 모바일과 인터넷 기사 클릭 수에 따른 수익을 외면할 수 없는 언론. 그에 부응하지 않을 수 없는 현장 기자. 스스로도 정치판을 대하는 안목이 가벼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조금이라도 그 속도를 늦추고 싶다. 정치부 기자 훈련받을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 본다.
정치 기사를 분류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스트레이트다. 정책과 인사. 국가 운영의 틀과 연관된 내용이다. 종이신문 1면이나 각 섹션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다음은 해설이다. 스트레이트가 지닌 의미를 설명해주기 위함이다. 좀 더 설명이 필요하면 취재원과의 일문일답을 싣는다. 그러고도 미흡하면 스케치를 기사화한다. 취재 현장의 모습, 뒷얘기 등이다. 각 언론매체의 의견을 전하는 면도 있다. 사설과 칼럼이다.
1990년대 초까지 신문에 정치 가십란이 따로 있었다. 스케치로 쓰기 어려운 가벼운 얘기들. 가독성이 높았다. 정치인들이 거명되길 바랐던 코너였다. "부음 기사 빼고는 언론에 등장하는 게 낫다." 당시 정치인들은 그랬다. 인지도가 중요했다. 사법 처리될 내용이 아니라면 살짝 비틀더라도 거론되는 게 나았다.
그런 가십란이 사라졌다. 굵직한 정치 이슈가 만발했던 시절. 가십으로 정치를 희화화하지 말자는 선배 언론인들의 각성이 있었다. 하지만 엄숙함은 대중과 맞지 많았다. 특히 인터넷으로 인해 정보 만개 시대가 열렸다. 언론도 피처 기사, 스토리텔링 기사로 독자의 흥미에 부응했다. 본질적 콘텐츠와 양념 격의 재미. 무엇이 중요한가.
요즘은 가십란이 언론 보도를 온통 뒤덮은 느낌을 준다. 피처 기사, 스토리텔링 기사가 가십의 확대판인가. 대선 TV토론의 단골 메뉴로 버스와 지하철 요금이 등장한 게 오래전이다. 후보가 모르면 머쓱해지긴 했다. 그렇다고 심각한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이제는 달라졌다. 자판기 사용법, 제사상 술잔 방향 등. 2017년 대선 때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서민 실정에 어둡다는 비판에 지지율이 급락했다. 세금, 부동산, 복지 정책과 남북문제, 국방, 외교. 국민의 삶을 좌우하는 굵직한 토론보다 가십성 잔매가 더 아파지는 상황이 됐다.
‘꼬리가 머리를 흔든다’는 격언이 있다. 언론 용어로 바꾸면 이렇다. ‘가십에 스트레이트가 온데간데없다.’ 물론 꼬리와 머리는 신경조직으로 연결돼 있다. 꼬리가 부실한데 머리인들 온전하겠느냐는 지적이 일리는 있다. 그럼에도 우선순위를 꼽으라면 역시 머리다. 후보 선택에서 머리부터 놓고 판단하는 게 시행착오를 줄인다. 한순간의 기분에 휩쓸리지 않는 길이다.
대선 후보 캠프부터 각성해야 한다. 국가 백년대계를 향한 정책을 성의 있게 내놓고 심판받는다는 기본자세를 갖추길 바란다. 가십성 퍼포먼스, 상대 실수와 실언의 확산은 양념이어야 한다. 정치 기사를 쓰는 기자들도 조금 더 숙고했으면 한다. 지금 쓰고 있는 기사가 스트레이트인가, 가십인가. 독자들도 마찬가지. 표출된 기사가 본질 문제인지 한번 생각하면서 읽어주시길 당부드린다.
언론인도, 유권자도 만물박사는 아니다. 그래도 대선처럼 중요 일정이 다가오면 한두 개 천착하는 분야가 있어야 한다. 첨예한 현안인 부동산 정책,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세금 정책, 국가 안위를 좌우하는 대북 및 안보 정책, 코로나19 시대를 극복할 복지·보건 정책. 자신의 관심 분야에서 후보 공약을 유심히 챙겨보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진정한 호모폴리티쿠스(정치적 인간)가 되려면 약간의 수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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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희 아시아경제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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