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유인호 기자] 9일 오전 8시30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정의용 신임 외교부 장관은 취임식에 앞서 이곳을 찾아 순국선열을 참배했다.


그는 방명록에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켜 이 땅에 다시는 참혹한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70대 노년의 외교관 얼굴과 글귀에서 비장함이 묻어났다.

정 장관은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취임식에서도 비장함을 이어갔다. 그는 취임사에서 "냉전의 한가운데서 우리 외교를 진두지휘하고, 한미동맹의 초석을 설계한 고(故) 박동진 장관은 ‘외교관은 총 없는 전사’라는 말을 자주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외교관으로서 반드시 지녀야 할 자질로 전쟁에 뛰어든 전사에 버금가는 사명 의식을 강조한 것이다.


정 장관은 1971년 제5회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부에 들어왔다. 정 장관의 초년 외교관 시절 존경하던 인물이 고 박 장관이다. ‘최장수 외교수장’이라는 기록을 가진 고 박 장관은 우리나라 현대 외교의 기반을 닦은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1975년 12월 장관으로 임명돼 1980년 9월까지 4년9개월가량 외무장관으로 재직했다.

당시 도덕주의를 표방한 미국의 카터 행정부와 유신 체제 간의 대립으로 불편한 한미 관계를 잘 조율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76년 소위 ‘코리아게이트’로 한미 간 불거진 외교갈등을 수습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격동기 한미 외교를 책임졌던 고 박 장관을 떠올린 것은 그만큼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전선이 총성 없는 전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달 열린 8차 당대회에서 대남통일 노선을 ‘연방제통일’에서 핵·미사일에 의한 ‘무력통일’로 바꿨다. 북한은 무력통일 노선을 헌법에 우선하는 노동당 규약에 명시했다. 북한은 핵무기 증강과 함께 남한을 언제든지 타격할 전술핵무기와 미국에 대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잠수함용 미사일(SLBM) 등을 개발하겠다고 했다. 대놓고 핵위협을 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과 중국은 여전히 으르렁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최근 미얀마 군부 쿠데타, 대만 해상훈련 등의 정치·군사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 문제를 놓고도 날선 대립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고조된 미·중 갈등이 바이든 행정부 출범 뒤에도 ‘허니문’ 없이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 장관의 역할과 부담감은 커졌다. 정 장관 앞에 놓인 우려스러운 일들은 한둘이 아니다.


당장 미국과 북한 비핵화 문제를 놓고 의견차를 보이고 있다. 그는 "북한이 비핵화 의지가 있고, 한반도 평화가 일상화됐다"는 생각인 반면, 미국은 "북한이 군사력 증강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다"는 정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 같은 의견차를 인식해서인지 정 장관은 9일 오후 기자들과의 상견례 자리에서 "최근 한미 간에 여러가지 어젠다가 있지만 한미 간에는 기본적으로 입장에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며 "동맹관계가 굳건해 그것을 기초로 다소 상이한 의견이 있다 하더라도 조율하는 데 크게 문제가 없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우리 외교의 근간인 한미동맹을 토대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정착을 위해 미국을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한 셈이다.


그러나 외교에 있어 지나친 자신감은 금물이다. 비장함은 유지해야 하지만 너무 극적인 상황 전개는 기대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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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장관이 싱가포르의 기적을 만든 당사자이지만 트럼프 때의 보여주기식 외교는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전사의 열정’과 ‘외교관의 냉정’ 사이 균형점을 찾아야만 한다.


유인호 기자 sinryu00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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