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특화 무기 '쇠뇌'
669년 신라에 파견된 당나라 사신이 황제의 조서(詔書)를 전달했다. 조서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당나라 사신이 돌아가면서 신라의 쇠뇌 기술자 구진천(仇珍川)을 데리고 갔다. 나당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신라의 기술자를 데리고 간 점에서 주목되는 사건이다. 당 황제는 구진천에게 목노(木弩)를 만들게 했다. 목노가 완성되고 화살을 발사해보니 30보밖에 나가지 않았다.
황제가 물었다. "내가 듣기로 너희 나라에서 노를 만들어 쏘면 1000보가 나간다고 했다. 지금 보니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이냐?" 구진천이 답했다. "나무의 재질이 좋지 못해 그렇습니다. 만약 신라에서 나무를 가져온다면 만들 수 있습니다."
당 황제는 신라에 다시 사신을 보냈다. 목재를 구해 오라는 것이었다. 신라의 목재로 구진천이 다시 목노를 만들어 발사했지만 60보밖에 나가지 않았다. 당 황제가 이유를 묻자 구진천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 역시 그 까닭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바다를 건너는 동안 나무에 습기가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당 황제는 구진천이 일부러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 생각하고 무거운 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구진천은 끝내 자기의 재주를 다 드러내지 않았다.
구진천의 1000보 노에 관한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후 구진천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황제를 능멸한 죄로 목숨은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구진천이 당으로 건너간 것은 668년 고구려 멸망 후 신라와 당의 관계가 악화하던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당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그만큼 신라의 쇠뇌 기술이 탁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렇다면 신라는 어떻게 1000보나 나가는 쇠뇌를 제작할 수 있었을까.
4~5세기까지만 해도 전투는 야전(野戰) 중심이었다. 6세기를 거치면서 삼국 간의 상쟁이 격화하고 축성이 활발해지면서 성전(城戰) 비중은 높아졌다.
7세기에 이르러 성전 비중이 야전보다 배 이상 많아졌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전투 유형들을 분류해보면 야전보다 성전이 활발해진 것은 분명하다. 이에 공성과 수성을 위한 무기·장비가 발달했다. 이와 관련해 고구려의 사례를 들여다보자.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권5에 따르면 고구려는 사거리 1000보의 목노를 보유했다.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 당시 이 화살에 눈을 맞았다고 기록돼 있다. 비록 후대의 기록인 데다 설화적 요소가 강하지만 고구려의 대형 쇠뇌 기술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태백음경(太白陰經)'과 '통전(通典)'에는 목노의 길이가 1장2척으로 기록돼 있다. 대략 환산해보면 약 3m60㎝에 이르는 대형 쇠뇌였음을 알 수 있다.
669년 신라 파견됐던 당나라 사신
돌아가면서 최고 쇠뇌 기술자 데려가
목노(木弩) 만들게 했더니 신통찮아
30보밖에 못 나가는 이유 묻자
"나무재질 좋지 못해 그렇습니다"
신라 목재 구해와 만들어도 60보 뿐
"바다 건널때 나무에 습기 스며 안돼"
끝내 자기의 재주 다 드러내지 않아
중국에서 사거리 1000보의 상노(床弩)는 송대(宋代)에 등장한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삼국의 쇠뇌 제작 기술은 중국의 수·당보다 앞섰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쇠뇌 제작 기술은 어디서 왔을까. '수서(隋書)' 권81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태부(太府)의 공인(工人)은 그 수가 적지 않으니 (평원)왕이 그들을 필요로 한다면 스스로 문주(聞奏)하면 될 것인데 여러 해 전에 재화를 갖고 몰래 들어와 소인(小人)을 이익으로 움직여 사사로이 노수(弩手)를 데리고 그대의 나라로 도망하였다. 병기를 수리하는 의도가 착하지 못하므로 바깥 소문을 두려워하여 도둑질한 것이 아니겠는가."
위 내용은 590년 수 문제(文帝)가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에게 보낸 새서(璽書)의 일부다. 수나라에서 쇠뇌 제작은 태부시(太府寺) 소관이었다.
태부시에는 군기(軍器)를 만드는 자 등 각종 기술자가 소속돼 있었다. 쇠뇌 기술자는 태부시 예하의 궁노서(弓弩署)에 배치돼 있었다. 이들 기술자를 고구려가 유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590년 이전에 수나라 쇠뇌 기술자를 데려왔다는 얘기가 된다. 옥새가 찍혀 있는 공식 문서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시 큰 문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668년 10월 고구려가 멸망한 뒤 같은 해 11월 신라는 고구려의 포로 7000명을 경주로 압송해왔다. 고구려의 유력민들이 이미 당으로 압송된 상태였으니 이들은 전투 과정에서 사로잡힌 병사나 기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일반 백성 수천 명을 경주까지 압송할 이유가 없다. 이들 포로는 노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었음이 분명하다.
고대 사회에서는 무기 수준에 별 차이가 없었다. 평시 병력 관리는 체계적이지 못했다. 따라서 더 많은 병력을 확보하고 효율적인 동원 체제를 구축하는 게 강한 군사력 보유의 주요 방안이었다. 이미 훈련받은 적군 포로가 있다면 이들을 새로운 병력 자원으로 충당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신라가 압송해온 고구려 포로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포로 생활보다 신라에 협조해 살아남기를 바랐을 것이다. 다시 신라군으로 편입돼 전장에 나가거나 자기가 가진 기술을 제공해 살아남아야 했다. 신라는 이들로부터 고구려 지역에 대한 군사 정보를 습득하고 군사 기술도 전수받았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선진화한 쇠뇌 제작 기술이 신라에 전파됐을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쇠뇌 제작 기술을 흡수하고 공방까지 만들어 전문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호사설 보면 고구려 때부터 만들어
목노 길이 대략 3m60㎝로 대형 쇠뇌
中의 1000보 상노(床弩) 송대에 등장
우리나라 기술이 수·당보다 앞서
신라가 압송해온 고구려 포로들
선진화된 쇠뇌 제작 기술 전파
'천보노' 나오기 전부터 무기 특화
성전(城戰) 비중 높아 비약적 발전
신라에는 사설당(四設幢)이라는 부대가 설치됐다. 노당(弩幢), 운제당(雲梯幢), 충당(衝幢), 석투당(石投幢)이 바로 그것이다. 노당은 쇠뇌를 특화한 부대, 운제당은 성벽을 넘기 위한 사다리 특화 부대, 충당은 성문을 부수기 위해 특화한 부대, 석투당은 투석으로 성벽과 건물을 부수기 위해 특화한 부대다.
사설당을 전투부대 혹은 제작부대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부대 이름 가운데 '설(設)'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제작부대라는 견해에 무게가 더 실린다. 어느 쪽이든 모두 공성과 수성을 위해 만들어진 특화부대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노당이다. 신라가 공수성전에서 쇠뇌를 가장 중시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670년부터 나당전쟁이 본격화했다. 당군은 670년대 초반 말갈과 거란 등 유목 기병을 거느리고 한반도로 진군해왔다. 이 시기에 신라는 여러 군 부대를 창설하고 병부(兵部)의 관원도 정비했다. 671년에 노당 1인을 두고 이어 672년에 노사지(弩舍知) 1인을 뒀다.
노당과 노사지는 노, 다시 말해 쇠뇌와 관련된 관직임이 틀림없다. 쇠뇌의 성능이 크게 개선돼 생산ㆍ관리를 전담하기 위해 설치한 관직으로 파악된다. 신라는 장창·쇠뇌를 활용해 야전에서 당군과 맞서 싸워 이기기도 했다.
원래 신라는 구진천의 '천보노'가 제작되기 전부터 쇠뇌를 특화한 나라였다. '일본서기' 권19에 신라가 장극(長戟)과 강노(强弩)로 임나(가야)를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의 주요 병기가 장창과 쇠뇌였다는 것이 일본에 알려질 정도였다. 가야는 562년 9월 멸망했으니 6세기 중엽에 이미 신라에서 쇠뇌가 특화한 무기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는 558년 2월 신득(身得)이 포노(砲弩)를 만들어 국원성 위에 설치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무렵 수성용 대형 쇠뇌가 설치됐다고 볼 수 있다.
'신당서(新唐書)' 권200에 8세기 신라 상황이 기록돼 있다. 당시 신라는 변경 지역에 관문을 설치하고 노사(弩士) 수천 명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731년 9월 성덕왕은 적문(的門)에서 백관까지 거느리고 차노(車弩) 사격을 관람했다. 741년 4월 효성왕은 정종(貞宗)과 사인(思仁)에게 명해 노병(弩兵)을 사열하게 했다.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에도 쇠뇌를 주력 무기로 특화해 중시했던 것이다. 이런 신라의 쇠뇌 기술은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기술자들을 흡수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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