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월리스·미치 와이스 '카운트다운 1945'
美, 히로시마에 핵폭탄 투하까지 116일간의 기록, 시·분·초로 소개
트루먼 대통령 등 관련자 심리·고뇌·결정·행동 스릴러처럼 생생하게 전해

[이종길의 가을귀]核실수였나, 核정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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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세계 최초의 핵무기 '리틀 보이(Little Boy)'가 일본 히로시마 상공 580m에서 폭발했다. 도시는 순식간에 검은 연기로 뒤덮였다. 그 안에는 죽음만이 존재했다. 핵폭탄을 투하한 미군 폭격기 B-29 '에놀라 게이(Enola Gay)' 승무원들은 놀랍고 슬픈 감정에 압도당했다.


항법사 시어도어 밴커크(1921~2014)는 "검은 기름을 태우는 가마솥 같았다"고 표현했다. 조종사 폴 티베츠(1915~2007)는 "단테가 쓴 '신곡'의 지옥처럼 검은 연기가 우리를 집어삼킬 듯 위로 끓어올랐다"고 증언했다.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1917~1983)는 일간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이렇게 전했다. "시간이 시작된 이래 인류의 재앙이었던 전쟁은 이제 믿을 수 없을 만큼 공포의 대상이 됐다."

그 시각 해리 트루먼(1884~1972) 미국 대통령은 해군의 오거스타호에 있었다. 사병 여섯 명과 함께 선미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메모가 전달됐다. "맨해튼에 관한 후속 정보 수신함. 결과는 모든 측면에서 분명하고 성공적임. 시각 효과는 어느 시험에서보다 더 훌륭함."


트루먼 대통령은 건너편에 있던 제임스 번스(1879~1972) 국무부 장관을 부르더니 "이제 집에 갈 시간이오"라고 말했다. 사흘 뒤 더 강력한 플루토늄 원자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지자 일본 천황은 항복을 선언했다.

사람들은 종전과 해방의 기쁨을 누렸지만 끝없는 논쟁에 휩싸였다. 계속됐다면 사상자 수십만 명이 더 발생했을 전쟁을 일본 민간인 수만 명의 희생으로 대체한 게 과연 정당하냐는 물음이었다.


'폭스뉴스 선데이' 진행자 크리스 월리스와 미치 와이스 AP 탐사보도 기자가 쓴 '카운트다운 1945'는 답을 찾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떨어뜨리기까지 116일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시ㆍ분ㆍ초 단위로 나눠 소개한다. 관련자들의 심리ㆍ고뇌ㆍ결정ㆍ행동을 스릴러 영화처럼 생동감 있게 전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대통령의 사망으로 하루아침에 최고 결정권자가 된 트루먼 대통령과 '맨해튼 사업'을 진두지휘한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 미 육군 항공대 최고 조종사 티베츠 등이다.


이들 대다수는 전후에 자기 결정과 행동이 정당했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후회와 뉘우침을 애써 억누르는 뉘앙스까진 숨기지 못했다. 진보 성향 잡지 뉴리퍼블릭은 "인류가 평화롭게 살거나 터무니없이 방대한 규모의 파괴에 직면하게 될 것이 분명한 듯하다"고 전했다.


경고음을 처음 울린 건 과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원자폭탄 투하 전부터 반대 목소리를 냈다. 여기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도 있었다. 그는 훗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폭을 만들라고 권고한 것이 일생 최대 실수였다고 털어놓았다.


이들과 달리 미국인 대다수는 원폭 투하를 반겼다. 당시 갤럽 여론 조사에서 미국인의 85%가 원폭 투하 결정을 지지했다. 진주만 공격과 일본군의 잔혹 행위에 관한 숱한 보도를 접한 터라 연민이라곤 전혀 없었다.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가 모든 정보를 엄격하게 통제해 핵폭발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논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미 국립항공우주박물관(NASM)은 1995년 히로시마 폭격 50주년 전시회를 진행했다. 당시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인지하고 계속되는 군비 경쟁을 새롭게 바라보자는 취지에서였다.


퇴역 군인 단체와 정치인들은 일본에 너무 동정적인데다 태평양 전쟁 참전 용사들을 모욕하는 일이라며 항의했다. '에놀라 게이'에 승선했던 밴커크도 가세했다. "일부에서는 일본인에게 폭격은 기본적으로 복수와 이른바 미국의 인종주의를 위한 활동이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일부에서는 우리 모두 미쳤다고 했고요. 알다시피 우리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원폭 투하에 대한 지지도는 꾸준하다. 2005년 조사에서 57%가 사용을 찬성했다. 반대는 38%에 그쳤다. 세대 간 격차가 확연했다. 65세 이상 미국인 10명 가운데 7명은 핵무기 사용이 정당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30세 이하에서 동의하는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어느덧 지구상 핵폭탄과 탄두 비축량은 5만 개에 육박한다. 그러나 전쟁에서 이를 사용해본 나라는 딱 하나다. 이 책은 결정을 내렸던 사람을 다시 조명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1966년 뉴욕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 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라면서도 "거리낄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그가 달리 선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비현실적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루스벨트가 3년 전 승인한 사업에 대해 어떤 귀띔도 받지 못한 채 대통령이 됐다. 10만 명 이상이 징집되고 20억 달러 이상이 지출됐다. 그리고 석 달 뒤 원폭 실험이 성공했다. 책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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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결정에 여전히 의문을 표시한다면 트루먼이 광범위하게 자문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폭탄 사용에 반대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 같은 조언자들로부터도 의견을 들었다. 그는 이 결정을 놓고 번민했다. 밤에 잠을 못 이루고 독일 여름의 열기 속에서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유프라테스강 유역 시대에 예언된 불의 파괴'에 관한 그의 예언적인 글을 보면 무엇이 걸려 있었는지를 그가 충분히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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