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세 노인에게 75년만에 용서구해
17살 전쟁범죄로 유죄선고
전쟁범죄 잊지 않고 기억하는 독일

[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 93세의 한 독일 남성이 75년 전 잘못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17살 때,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심판이 이뤄진 것이다. 브루노 데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남자의 죄는 눈앞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집단학살)를 방조했다는 것. 그는 1944년부터 1945년까지 폴란드의 슈투트호프 수용소에서 나치 친위대 소속 경비로 있었다. 재판부는 이 기간에 5230명의 죽음을 지켜보며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지난 23일(현지시간) 독일 함부르크 소년법원은 데이에게 2년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당초 독일 검사들은 데이에게 3년형을 구형했다. 그가 수용소 경비로 있으면서 유대인이나 정치범 등으로 구성된 수용자들의 탈출을 막아섰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가 실형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령 등의 이유가 아니다. 그가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그의 나이가 17살, 청소년 시절의 잘못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재판도 청소년 법정에서 이뤄졌다.

재판정에 선 브루도 데이 [이미지출처=로이터연합뉴스]

재판정에 선 브루도 데이 [이미지출처=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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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에 탄 채로 재판을 받아왔던 데이는 "재판과정 중에 알게 된 것들에 대한 생각을 밝히는 것은 너무 중요한 일이라고 느낀다"며 최후 진술을 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나치 친위대 수용소에서 강요 때문에 일했고, 경비 업무를 맡았던 것도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만 생각을 했었다"면서 "증인들의 증언과 전문가들의 진술 등을 듣고 난 뒤에야 공포와 고통의 크기를 실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 미친 지옥을 겪었던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면서 "이런 일은 다시는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재판에서는 30명 이상의 생존자가 증언에 나섰다. 이들은 슈투트호프 수용소 전기 철조망에서 친척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의 유골을 모아야 했고, 영하의 기온 속에서 나체로 지냈었던 그 시절의 참상을 고발했다.

데이는 재판에서 수용소 가스실에서 터져 나온 비명을 들었으며, 이들의 시신이 태워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자신이 직접 총을 쏜 일은 없었으며, 당시의 참상과 공포가 남은 생애를 괴롭혀왔다고 토로했다. 데이의 변호진 역시 "당시 그가 수용소 경비병을 맡은 것은 자신이 선택이 아니었으며 수용된 유대인의 탈출하게 하거나, 자신이 맡은 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 그 자신을 위태롭게 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역시 살기 위해 명령을 따랐다는 주장이다.

독일 함부르크 재판부 [이미지출처=로이터연합뉴스]

독일 함부르크 재판부 [이미지출처=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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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재판부는 유죄를 선고했다. 이와 관련해 재판부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인간의 존엄은 존중되어야 한다"면서 "설령 그것이 자신의 안전을 대가로 할지라도 그렇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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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는 심판을 받지 않은 전범들에 대한 책임 추궁이 계속 진행중이다. 재판에 서게 된 이들 대부분은 데이처럼 이미 나이가 90을 넘어섰으며, 당시 맡았던 역할이 집단학살 과정의 보조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이들은 과거 냉전 시기 독일 사법당국의 심판 대상에서 비켜섰었다. 하지만 통일한 뒤 독일 정부는 기억과 속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이를 위해 수도에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세우고 나치 전쟁 범죄 피해자들을 위한 보상 기금 등을 만들었다. 이후 수십년에 걸쳐 독일 사법부는 전쟁 범죄자들에 대한 심판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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