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규 서울회생법원 부장판사

전대규 서울회생법원 부장판사

AD
원본보기 아이콘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불행한 연인들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원수 집안 남녀의 사랑에 관한 흔한 주제의 이야기다. 무도회에서 로미오는 줄리엣을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둘은 사랑을 약속하면서 줄리엣은 로미오가 원수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한탄한다. 그러자 로미오는 "이름이란 뭐지? 우리가 장미를 그 어떤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향기로운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라고 말한다. 절절한 구애를 표현한 명대사다. 로미오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이름이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현대 사회에서 개인이건 기업이건 이름은 중요하다. 개인에게 있어서는 운명과 이미지를, 기업에 있어서는 매출 등 영업실적을 좌우할 수 있는 요소다. 최근 들어 개인들의 개명이 늘어나고 있다. 기업들의 사명 변경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스타벅스 커피'가 '커피'를 빼고, '던킨 도너츠'가 '도너츠'를 뺀 것이 그것이다. 이름(사명)을 바꾸는 이유는 다양하다. 개인들은 주로 이름이 혐오스럽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등이고, 기업은 미신적인 것도 있지만 현재는 주로 사업 영역의 확장을 위한 것이 많다.

기업이나 개인의 재정적 어려움을 구제하는 사건을 담당하는 법원으로 2017년 서울회생법원이 출범했다. 일반적으로 빚을 변제하지 못하거나 지급이 불가능한 상태를 파산 또는 도산이라 한다. 파산 또는 도산사건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법원을 어떻게 명명할 것인가. 처음에는 서울파산법원이 검토됐다. 현대 도산법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도 파산법원(bankruptcy court)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파산은 법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망하게(파산하게) 하는 법원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준다는 비판이 있었다.


다음으로 고려된 것이 서울도산법원이었다. 파산보다는 도산이 완화된 의미를 포함하고, 법원의 성격상 파산한 개인이나 기업에 관한 사건을 다루는 데 전혀 관련이 없는 이름을 붙이는 것 또한 문제이므로 유력한 대안으로 검토됐다. 그러나 도산이라는 것도 여전히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검토된 것이 서울회생법원이었다. 법원이 파산(도산)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개인이나 기업을 구제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회생시킨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좋은 이미지와 당사자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준다는 점에서 서울회생법원은 긍정적이다. 다만 서울회생법원에서 취급하는 사건이 회생사건뿐만 아니라 파산사건도 있는데, 파산사건을 포섭하지 못하는 이미지를 준다는 반론도 있다.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채무자회생법)'을 제정함에 있어서도 동일한 고민이 있었다. 채무자회생법은 크게 회생절차, 파산절차, 개인회생절차가 있다. 파산절차가 연혁이나 이론적 측면에서 원칙이기 때문에 채무자회생법을 편제함에 있어 파산절차를 맨 앞에 두는 것이 체계정합성에 있어서 맞다. 미국의 경우도 파산절차가 회생절차보다 앞에 있고, 일본은 파산법을 기본으로 해 회생절차 관련 법(민사재생법ㆍ회사갱생법)에서는 파산법을 준용하고 있다. 그래서 채무자회생법을 제정할 때 파산절차를 앞에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회생절차를 파산절차보다 먼저 규정하기로 했다.

AD

이유는 채무자회생법이 개인이나 기업을 회생시키기 위한 법이지 파산시키기 위한 법이 아니라는 시그널을 시장에 주기 위한 것이었다. 채무자회생법은 회생절차, 파산절차, 개인회생절차의 순으로 규정되어 있다. 중국의 '기업파산법'도 우리와 마찬가지 이유에서 회생절차가 파산절차보다 앞에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시그널에 방점을 두다 보니 체계상이나 이해에 있어 복잡하고 어려운 법이 되고 말았다. 예외가 먼저 규정되고 원칙이 뒤로 가다 보니 조문이 중복되고 체계적인 입법이 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로미오의 말처럼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 이름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름이 주는 이미지와 시그널의 중요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름에는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있고, 대외적인 각오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회생법원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어려움에 빠진 개인이나 기업을 재건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회생법원에 거는 기대가 큰 이유이다. <전대규 서울회생법원 부장판사>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놓칠 수 없는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