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의 영화읽기]냉이 캐고 들꽃 꺾어…엄마, 상 차려 드릴게
박혜령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밥정'
임지호씨는 나물 예찬론자다. 할머니들을 만날 때마다 각 채소의 특징과 효험에 대해 설명해준다. “자연과 가까우면 먹을 수 있는 게 많아요.”[사진=엣나인 제공]
낳고 키워주신 두 분의 어머니 그리며 세상의 모든 모친께 대신 바치는 한끼
할머니 부음 듣고 밤새워 빈집서 제사상 차린 방랑식객…감사의 마음 담은 꽃상여 아닌 밥상여
※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받는 밥상은 어머니 품이다. 옅으면서도 진한 모유로 맛 여행을 시작한다. 다양한 맛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인생의 맛까지 간파한다. 자연요리 연구가 임지호(64)씨는 그 순리를 충실히 따른다. 그는 저서 '마음이 그릇이다 천지가 밥이다'에 "어머니가 몸으로 주는 맛이야말로 마음으로 준 맛이었음을 깨닫고 그리워하게 된다"고 썼다.
임씨에게 요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닮으려 노력하는 과정이다. 세상 모든 어머니에게서 대지의 포용력을 배운다. 그렇게 만든 음식은 깊고 심오한 사랑 같다. 우주적 질서에 역행하지 않으며 숭고한 신의 의지를 담아낸다.
그에게는 두 어머니가 있다. 생모와 수양모다. 생모는 세 살배기 임씨를 생부에게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임씨는 그 사실을 스무 살 때 전해들었다. 곧장 사고가 난 큰길로 달려갔지만 나무 밑동에 기대앉아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울고 나니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생모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충분히 사랑을 주고받은 살가운 모자였던 것처럼 어머니가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 그러고 보면 나는 스무 살에야 또 한 분의 어머니를 되찾은 셈이다."
박혜령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밥정'에서 임씨는 할머니들에게 밥을 지어 드린다. 친근한 얼굴로 다가가 일손을 거들고 주변에서 식재료를 수집한다. 냉이, 광대나물, 전호, 망초대, 지칭개, 달래, 돌옷…. 요리는 속전속결이다. 아궁이를 덥히고 칼질 몇 번 하니 요술이라도 부린 듯 뚝딱 새로운 음식이 나온다. 할머니들은 하나둘 모여 수저를 들고 좋아한다.
"맛이 참 좋소." "간이 딱 맞고 맛 있네요." "요리 잘하네요." "아까 내가 못 먹는다 그래 가지고(웃음), 맛있게 잘 먹었어요."
오글쪼글 주름 잡힌 손으로 임씨의 등을 두들겨 주는 할머니들. 임씨에게는 모두 어머니다. 그리움이 큰 만큼 기억해야 할 어머니가 너무 많다. 지금도 생모가 이렇게 생겼을까, 저렇게 생겼을까 한참 뜯어본다. 그들을 어머니로 생각할 수 있어 행복하다며 헛헛하게 웃는다.
임씨를 정성으로 키워 준 수양모는 그가 군 복무를 했을 때 돌아가셨다. 가슴에 박힌 한이다. 좋은 것 하나 변변하게 만들어 드린 기억이 없다. 열한 살에 집에서 떠나면서 좋은 자동차를 끌고 오겠다던, 원 없이 맛난 것을 먹을 수 있게 해드리겠다던 약속은 물거품이 됐다. 중풍으로 쓰러져 6년 동안 고생하다 하늘의 부름을 받은 어머니. 그는 장례식장 한 귀퉁이에서 펜으로 글을 썼다. 어머니를 향한 연서(戀書)였다.
"하늘 무너지는 소리/온통 캄캄한 밤/아무 약속도 지키지 못한 기나긴 날들 속에/한 줌 먼지로 돌아가는 어머니께/가슴 찢어지는 애통함을 흙으로/덮어 가는 무덤/그 모습이 그 향기가/그 고귀한 삶의 지혜가 함께 덮였습니다/어머니 당신은 나를 위해/그 수많은 긴 밤을 애통한 눈물로 지새웠고/그저 하늘 바라보고 신께 빌었소/그 아이 살아가는 길이 밝은 빛으로 가득 차라고."
그는 밥상을 차린다. 어머니를 위한 것이다. 지리산 자락에서 웃어주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인기척도 없는 집에 들어가 밤새워 진수성찬을 만든다. 민어찜, 도미찜, 양태찜, 족편, 닭고기완자, 닭고기찜, 문어숙회, 생선전, 배추전, 묵, 콩인절미, 맑은장국…. 임씨는 숟가락 꽂힌 고봉밥 옆에 초헌(初獻)을 올린다. 비로 젖은 평상에 나부죽이 엎드려 절한다.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할머니의 제사상을 차리는 모습이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임씨가 맛의 여행으로 얻은 작은 지혜를 들여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세상에 자기 혼자 힘으로 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송아지는 태어난 후, 어미가 혀로 핥아 태반을 떼어 주면 그때부터 혼자 서는 연습을 하고 몇 시간 후면 걷기를 시작하지만, 사람은 그렇질 못합니다. 가장 잘났다는 인간이 그렇게 키운 정성마저 잊고 스스로 모든 걸 이룬 거라 생각하니, 어리석기로는 인간을 따를 생물이 없는 듯 보입니다. 나 역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어머니의 정성 때문이었다는 걸, 어머니가 힘겹게 세상을 사시다가 떠난 후에야 새삼 실감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경험하는 절반은 후회할 일을 만드는 일이고, 또 세상의 절반은 후회를, 그리고 쓰라림을 맛보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그 애틋한 사랑이 없었다면, 나에겐 외로움도 없었을 것이고, 참회도 몰랐을 것입니다."
임씨 요리의 뿌리는 결국 어머니다. 세상의 모든 그들에게서 우주의 품을 발견했다. 그 가슴을 찢고 나온 아들은 이제 생사의 무거운 짐은 내려놓으라며 요리를 바친다. 꽃 상여보다 아름다운 밥 상여다. 이승과 저승이 함께 할 수 없는 애타는 그리움은 그렇게 하염없이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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