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혜 예술사저술가·경성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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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년 여름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샬롯 왕비는 독일 태생의 영국 화가 요한 조파니(1733~1810)에게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우피치미술관의 트리부나를 그려오라고 명했다. 트리부나는 우피치미술관 맨 위층에 있는 팔각형의 방이다. 수천 개의 진주조개 껍데기로 돔 천장을 장식하고 벽은 붉은 벨벳 천으로 덮어 매우 호사로웠다. 여기에는 고대 메달과 소형 조각, 보석, 진기한 광물 등이 전시돼 있었다. 조파니는 1779년에야 완성된 그림을 갖고 돌아왔다.


조파니는 화가의 재량권으로 우피치미술관과 피티궁전에 있는 메디치 컬렉션 가운데 걸작을 골라 트리부나로 모아놓았다. 바닥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 화가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중심으로 '메디치의 비너스' '칼 가는 사람' 같은 고대 조각이 있다. 벽에는 라파엘로 산치오를 비롯한 르네상스 전성기 화가, 안니발레 카라치와 귀도 레니 같은 볼로냐화파 화가들의 그림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한스 홀바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도 보인다.

조파니는 관람객도 그려 넣었다. 그랜드 투어 중인 영국 신사들이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다. 18세기 유럽 상류층 사이에서는 몇 달씩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는 게 유행이었다. 우피치미술관 관람은 필수 코스였다.


조파니의 그림은 1780년 아카데미에 공개돼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조지 3세 부부는 썩 좋아하지 않았던 듯하다. 조파니는 영국 왕실의 돈으로 7년이나 이탈리아에 체류했다. 이런 그가 그곳에서 오스트리아 황제를 위해 그림을 그렸다는 소문에 조지 3세는 언짢아했다. 샬럿 왕비는 그랜드 투어리스트들이 그림에 삽입된 데 불쾌감을 드러냈다. 조지 3세 부부는 이탈리아를 방문한 바가 없고 트리부나의 정확한 묘사에만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18세기 중반 일반에 처음 공개된 우피치미술관은 유럽 전역의 부러움을 샀다. 유럽 군주들은 이에 자극받아 너나 할 것 없이 컬렉션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메디치 컬렉션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16세기 중반부터다. 15세기 메디치 통치자들은 예술가를 후원하고 정중히 대접했다. 하지만 그림이나 조각보다 서적, 고대 주화, 보석에 더 관심이 많았다. 메디치가(家) 최초의 권력자인 '위대한 코시모(코시모 데 메디치ㆍ1389~1464)'는 필사본을 모으는 데 힘썼다. 그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도 고대 주화와 보석, 희귀본 수집에 몰두했다. 보석보다 가격이 훨씬 낮던 그림은 투자 대상이 아니었다.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는 소년 미켈란젤로의 자질을 일찍이 알아본 인물로 유명하다. 로렌초는 예술가 지원 기금으로 보석, 꽃병, 고대 조각상을 구매했다.

요한 조파니 '우피치의 트리부나', 1777년, 123.5x155㎝(로열 컬렉션, 영국 런던)

요한 조파니 '우피치의 트리부나', 1777년, 123.5x155㎝(로열 컬렉션, 영국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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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말 메디치가는 미술품 139점, 서적 수백 권, 무수한 보석, 주화, 카메오(양각으로 조각해 유리 모조 보석과 연체동물 껍질 안에 박아 넣은 단단한 보석 혹은 이런 보석의 모조품), 꽃병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예술품보다 진기한 보물이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1494년 메디치가가 피렌체에서 쫓겨나면서 이 예술품ㆍ보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메디치가는 15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 300여년간 피렌체를 왕처럼 다스리며 부와 권력도 누렸다. 하지만 그 여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경쟁 세력과 침략할 기회만 엿보는 적대국에 둘러싸여 정권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메디치가의 통치 역사는 암살과 음모, 분란과 전쟁으로 점철됐다. 코시모만 해도 투옥과 추방 끝에 권력을 잡았다. 로렌초는 1478년 파치 가문이 보낸 자객에게 동생 줄리아노를 잃었다. 자기도 죽을 뻔했다. 메디치가는 1494년 권력을 잃고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피렌체는 1492년 프랑스 왕 샤를 8세의 침략에 무릎을 꿇었다. 갓 집권한 20세의 피렌체 통치자는 저자세로 프랑스 왕의 요구를 수용했다. 이로써 피렌체 시민들의 공분을 사고 말았다. 그 결과 메디치가는 피렌체에서 쫓겨나 18년 동안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샤를 8세의 군대는 도시를 짓밟고 메디치가의 보석과 보물도 약탈했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로 귀환한 것은 1512년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불만이 여전했고 주변 정세는 어지러웠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군대는 로마로 쳐들어가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정치적으로 로마와 밀접하게 얽혀 있던 피렌체도 공격 대상이었다. 시민들은 겁에 질려 메디치가에 기댔다. 메디치가는 반대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탈환했으나 황제의 눈치만 보는 신세로 전락했다.

아뇰로 브론치오 '갑옷을 입은 코시모 1세', 1544~1555년,
117.5x98.5㎝(뉴사우스 웨일즈 미술관,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아뇰로 브론치오 '갑옷을 입은 코시모 1세', 1544~1555년, 117.5x98.5㎝(뉴사우스 웨일즈 미술관,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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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7년 17세에 토스카나 대공으로 등극한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는 냉혹하고 유능한 군주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전임자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아무 준비 없이 대공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뜻밖의 수완으로 권력기구를 장악하고 반란도 제압했다. 혼란에 시달리던 시민들은 평화와 질서를 바랐다. 강력한 군주의 등장을 반긴 것이다.


코시모 1세 치하 30년 사이 피렌체는 안정을 되찾았다. 외세의 영향에서 벗어나 경제적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그는 15세기 메디치 통치자들이 형식적으로나마 표방하던 민주적 가치를 저버리고 권위주의적인 군주로 군림했다. 피렌체를 보수적으로 운영한 것이다. 그 결과 피렌체는 서서히 몰락해갔다.


코시모 1세는 나름대로 예술을 애호했다. 하지만 그는 예술을 군주의 위세 높이기에 이용했다. 위대한 코시모나 로렌초도 예술의 후광을 이용했다. 그러나 코시모 1세와 달리 예술가를 자기 의도대로 부리진 않았다. 그 결과는 미술사가 말해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산드로 보티첼리 등 많은 별이 빛나던 고전주의는 왜곡과 과도함이 지배하는 매너리즘으로 대체됐다. 우아함과 균형이 사라진 자리에 부자연스러움과 불안함이 밀고 들어왔다. 피렌체는 생기를 잃어갔다. 로마가 예술의 중심지로 우뚝 서고 회화는 베네치아가 주도했다.


외적인 웅장함과 형식에 몰두한 코시모 1세는 우피치미술관 건물을 남겼다. 우피치궁전 설계는 코시모 1세의 가신으로 인생 후반기를 바친 조르조 바사리가 맡았다. 우피치궁은 베키오궁전과 아르노강 사이에 있는 두 개의 긴 건물로 이뤄져 있다. 평행을 이루는 두 건물은 강 쪽에서 짧은 건물로 연결된다. 바사리는 이 부분의 1층을 아치 회랑으로 만들었다.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다. 그야말로 '신의 한 수'다.


두 건물 사이의 길쭉한 길 한쪽 끝에 베키오궁이 보이고 반대편 아치 사이로 아르노강 건너편의 푸른 언덕이 보인다. 안마당이라고도, 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 공간은 건물의 딱딱함을 누그러뜨려 독특한 매력이 돼 있다.


우피치궁은 원래 정부종합청사로 쓰려고 지은 것이다. 코시모 1세에게 집중된 권력은 이런 건물을 필요로 했다. 코시모 1세는 베키오궁과 우피치궁, 강 건너 자신의 주거지인 피티궁을 잇는 공중 복도가 있다면 편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상천외한 발상이었다. 바사리는 주군의 뜻을 받들어 '바사리 회랑'이라는 유명 구조물로 만들어냈다. 건물 외벽을 따라 지상 10m 높이에 설치된 약 1㎞의 회랑이다. 이로써 코시모 1세는 땅에 발을 딛지 않고 베키오궁에서 피티궁까지 오갈 수 있었다.


착공 20년 만인 1580년 우피치궁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코시모 1세도, 바사리도 세상을 떠난 뒤였다.

우피치 미술관 창문으로 보이는 바사리 회랑.(미술관 건물에서 나와 베키오 다리 위로 이어지고 있다)

우피치 미술관 창문으로 보이는 바사리 회랑.(미술관 건물에서 나와 베키오 다리 위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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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모 1세의 뒤를 이은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에 의해 1581년 우피치궁의 용도가 바뀌었다. 프란체스코 1세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던 가문의 수집품을 이리로 옮겨 전시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개인 공간에 있던 컬렉션이 공적 공간으로 옮겨져 미술관 탄생의 시초가 됐다.


코시모 1세 사후 메디치가는 빠르게 쇠락해갔다. 그러나 미술품은 크게 불었다. 기울어가는 가문의 후예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와 아름다움을 탐닉했다. 일례로 미술품 수집광이던 레오폴도 데 메디치 추기경(1617~1675)은 회화 700여점, 드로잉 1만1000여점을 모았다.


1737년 메디치가의 마지막 남자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메디치가가 갖고 있던 토스카나 대공 지위는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갔다. 당시 남아 있던 메디치가의 직계 후손은 잔 가스토네의 누이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뿐이었다.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그림, 서적, 보석, 가구, 기타 진기한 물건 등 가문의 수집품 전체를 피렌체에 영구 기증했다. 그는 기증 문서에서 "메디치 컬렉션이 나라를 아름답게 하고 공공의 이익과 외국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데 쓰여야 하며 절대 피렌체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고 못 박았다. 1741년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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