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호의 클래식 라운지] "연금개혁 반대" 백조, 거리에서 춤추다
세계 최고 명성 파리 오페라 발레단 17세기 후반 佛 부르봉 왕조 때 설립
대혁명 거치며 시민문화 축으로…명감독 누레예프 80년대 전성기 이끌어
마크롱 정부 연금개혁안에 생존 위협…64세 정년규정 맞서 공연 파업 결의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과 마린스키 발레단, 미국 아메리칸 발레시어터, 영국 로열 발레단이 과거 한국에 오면 '세계 3대' '세계 5대' 발레단이라는 수사가 반사적으로 따라붙었다. 한국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지만 국제적 명성과 브랜드 가치에서 세계 최고 발레단으로 평가받는 곳은 따로 있다. 1669년 창단된 파리 오페라 발레단(Ballet de l'Opera national de Paris)이 바로 그것이다.
파리 오페라 발레단은 17세기 후반 부르봉 왕조 시대에 설립됐다. 위계상으론 파리 국립 오페라극장(Opera national de Paris)의 전속 발레단이다. 1875년 건립된 가르니에 극장과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지어진 오페라 바스티유에서 번갈아 발레 공연에 나선다. 발레는 귀족ㆍ왕정 문화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대혁명을 거쳐 오늘날 프랑스 시민문화의 한 축이 됐다.
발레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태동했다. 프랑스 발레 문화의 기원은 1661년 루이 14세(1638~1715)가 설립한 왕립 무용 아카데미다. 16세기 프랑스 왕정의 오락물에 머물렀던 동작 체계는 루이 14세의 발레 교사 피에르 보샹(1636~1705)의 연구로 틀이 잡혔다.
1713년 파리 오페라 발레 교육이 정립되고 시대상의 변화에 맞춰 발레는 궁정을 벗어나 무대 예술로 진화했다. 움직임의 얼개가 안무로 자리 잡아 후대에 이어지는 전수 과정이 체계화했다. 발레 기교뿐 아니라 의상과 무용 신발도 파리를 중심으로 개선됐다. 자연스레 음악과 무대 전문가가 모여들고 안무 기법의 변화에 따라 취향이 다른 관객도 등장했다. 발레를 중심으로 주변 예술이 변모하는 양상이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유럽에 등장한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댜길레프(1872~1929)의 러시아 발레단 '발레 뤼스'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 커다란 자극제가 됐다. 발레 뤼스에서 무용수로 활약한 우크라이나 출신 세르주 리파(1905~1986)는 1929년부터 30년간 파리 오페라 발레단 감독으로 예술적 발전을 이끌었으나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에 부역한 혐의도 받았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영광은 옛 소련 태생 무용수 루돌프 누레예프(1938~1993) 덕이다. 누레예프는 키로프 발레(현 마린스키 발레)에 들어가 '니진스키의 재래'로 불렸다. 이후 서방으로 망명해 영국과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다. 1983년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예술감독이 됐고 기존 전막 작품을 본인의 재안무로 다듬었다.
그는 고전 발레에 실험적 연출을 시도했다. 과거 텍스트에 새 기운을 불어넣는 한편 실비 기옘, 샤를 주드마뉘엘 르그리 같은 글로벌 발레 스타도 양성했다. 게다가 마기 마랭, 윌리엄 포사이스 등 신진 안무가까지 발굴했다. 오늘날 이들 작품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곳이 파리 오페라 발레단이다.
누레예프는 1993년 사망할 때까지 '라이몬다' '돈키호테' 같은 대작 전막 발레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유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누레예프 이후의 파리 오페라 발레단 감독들(파트릭 뒤퐁·브리지트 르페브르·뱅자맹 밀피에·오렐리 뒤퐁)은 정반합 구조로 선임자의 전통을 존중하거나 제3의 길을 추구했다. 그 과정에서 조직의 무용 어휘를 가지런히 정돈했다.
그러나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오래 활동해 그곳 춤에 익숙한 무용수가 조직의 수장으로 등극하는 과정이 21세기에도 바람직한 일일까. 2010년대 말 불거진 세계적인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을 계기로 파리 오페라 발레단도 감독 인선에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2018년 파리 오페라 발레단원들은 내부 설문 조사에서 소속 발레단 출신의 현 오렐리 뒤퐁 발레감독을 비토했다.
위기에도 파리 오페라 발레단이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근원은 파리 오페라 발레 학교(Ecole de Danse de l' Opera de Paris)와 특유의 승단 체계 덕이다. 파리 오페라 발레 학교는 체형, 외모, 기술, 발전가능성까지 종합해 8세부터 외부와 격리해 발레를 가르친다.
이곳 학생들은 여느 프랑스 아동들과 전혀 다른 폐쇄적인 교육 환경에서 발레에 대한 모든 걸 배운다. 일반 교과 내용도 '발레에 사용되는 근육' '발레의 역사' '심장에 지방이 끼지 않도록 하는 법' 등 온통 발레에 관한 것들이다.
이렇게 해서 해마다 배출되는 졸업생들이 파리 오페라 발레단 입단 시험에 응시하고 여기서 통과하면 발레단 가장 아래 단원인 '카드리유(Quadrille)'가 된다. 엄선된 인력만 해마다 한 차례 시행되는 승급 시험을 통해 '코리페(Coryphee)' '슈제(Sujet)' '프르미에 당쇠르(Premiers danseur)'로 올라갈 수 있다.
높은 등위의 무용수가 발레단 레퍼토리의 주역에 가까워질 수 있어 댄서 간 경쟁이 극심하다. 발레단 최고 등급인 '에투알(Etoile)'은 승급 시험이 아닌 발레단 예술감독의 지명으로 정해진다. 발레단 공연이 끝나면 커튼콜 도중 공식 멘트로 에투알 임명을 알린다. 이때 무용단과 객석이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는 것도 파리 오페라 발레단만의 전통이다.
파리 오페라 발레단은 기본적으로 다른 발레단 소속 스타 무용수가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 객원으로 출연하거나 겸직할 여지를 없애면서 발레단 고유의 색채도 보존한다. 다만 소속 발레단원의 다른 발레단 출연은 발레감독이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그러나 다양성을 존중하는 프랑스 정부의 권고에 맞춰 파리 오페라 발레학교 출신이 아닌 외국인도 입단 시험은 치를 수 있다. 현재 150여명의 단원들 가운데 박세은(프르미에), 강호현(코리페), 윤서후(코리페) 등 한국인 무용수를 포함한 외국 출신은 25명 남짓이다. 다만 열다섯 명을 유지하는 에투알에는 여전히 파리 오페라 발레학교 출신만 포진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발레단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24일 40여명의 발레리나가 파리 오페라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평소 공연 장소인 가르니에 극장 앞에서 '백조의 호수'를 선보여 시민들로부터 갈채 받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정부가 추진하는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군중 앞에서 '파리 오페라 파업' '문화가 위험하다'는 현수막을 걸고 무용수들은 '발레'로 연대했다.
마크롱 정부의 연금 개혁안은 파리 오페라 발레단원들의 생존과 직결됐다. 프랑스는 17세기 말부터 파리 오페라와 코메디 프랑세즈(연극) 예술가가 이른 나이에 은퇴해도 연금이 보장되는 제도를 시행했다. 파리 오페라 발레의 경우 정년이 42세로 댄서들은 발레단 퇴단 이후 연금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마크롱 정부는 무용수들의 연금 수급권을 특혜로 규정했다. "파리 오페라 단원은 조기 퇴직해도 본인들에게 유리한 혜택을 받았다"며 "개정안이 정한 64세 정년 규정에 예외는 없다"고 못 박았다.
반면 파리 오페라의 무대 노동자와 발레단원들은 주말과 심야에 일하는 노동조건을 감안하고 어린 시절부터 자질 함양을 위해 노력한 연습과 시간도 노동으로 인정하는 현 제도가 존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다수 무용수가 10세 전 파리 오페라 발레 학교에 들어가 부모와 떨어져 날마다 5시간의 연습으로 10여년을 보낸다. 그러다 10대 후반이 되면 만성적인 부상을 안은 채 발레단에 입단한다.
마크롱 정부가 "연금개혁 해당자를 2022년 1월1일 이후 입단자에 한한다"고 수정 제안했으나 발레단 노조는 거절했다. "350년 역사에서 하나의 점에 불과한 존재가 미래 세대의 희생을 정할 수 없다"는 논리다.
세계 3대, 세계 5대 발레단 가운데 이처럼 시민사회와 함께한 곳은 없다. 파리 오페라 발레단은 무용 역사의 전통과 작품의 질뿐 아니라 사회 안에서 발레가 존재하는 의의를 실천적으로 제도화했다. 그런 면에서 세계 발레단의 귀감이 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이후 연일 공연이 취소되면서 극장의 손실은 하루가 다르게 늘고만 있다. 2007년 17개 공연 취소에 320만유로(약 42억3000만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번 파업 이후 올해 1월 초까지 티켓 손실액은 1200만유로에 이른다.
내년 나폴리 산카를로 극장 감독으로 떠나는 스테판 리스너 파리 오페라 총감독은 표면적으로 극장 재정에 대해 걱정한다. 하지만 이미 후속 인사가 결정된 상황에서 '처삼촌 무덤에 벌초하듯' 사태를 방치하고 있다.
파리 오페라 발레가 위험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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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원기자·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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