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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허스토리②]"이 곳은 성별 없는 전쟁터…가슴 뛰는 일에 도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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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경 SK건설 상무, 아나운서·경단녀·변호사·대형 건설사 임원 '가슴벅찬 도전'
"세 아이의 엄마는 오직 나 뿐" 결단
MBC 아나운서 퇴사 후 4년 간 전업주부
마흔살에 뉴질랜드서 공부해 변호사 합격
아이 키우며 배운 포용력이 리더십으로

클레임 업무 전선에…전문가 없는 영역에 도전
본인의 장단점 잘 알고 기회 기다려야

이현경 SK건설 상무./김현민 기자 kimhyun81@

이현경 SK건설 상무./김현민 기자 kimhyun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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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현정 기자] 공중파 아나운서와 프로듀서(PD)로 13년. 4년의 경력단절과 마흔 살에 뉴질랜드에서 도전한 법학 공부. 변호사라는 새 삶에 이어 대형 건설사 임원으로서의 오늘. 그리고 이 궤적을 함께한 세 아들.


이현경 SK건설 상무의 삶은 드라마틱하다. 익숙함에 안주하는 대신 낯선 것에 대한 도전을 마다하지 않았다. 도전은 고난이 아니라 즐거움이었다. 그래서다. 그녀의 서사(敍事)는 한없이 촘촘하고 깊다. 마냥 당당할 것만 같았던 이 상무는 그러나 뜻밖의 고백을 들려줬다. "자다가 깨 눈을 뜨기만 했는데도 너무나 절망스러워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던 때가 있었어요."

◆마흔살의 도전…法 공부 시작한 '경단녀'= 대학을 졸업하고 1986년 MBC에 입사한 그는 결혼과 두 아이 출산 후에도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유부녀 아나운서가 사표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남편 사업에 문제가 생겨 생계형 출근을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던 때다. 위성방송 태스크포스(TF)팀의 편성담당자라는 새 직무에 발령 나던 해 셋째 아이를 임신했고, 몸과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그래, 낳자. 그런데 이제 커리어는 끝이구나.' 눈물이 맺혔다. 그는 "MBC의 내 자리는 누군가로 분명 대체될 수 있었지만, 세 아이의 엄마 자리는 오직 나만이 잘해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희생이 아닌 선택을 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두 살, 세 살 터울의 아들 셋을 키우며 한국에서 4년여를 전업주부로 지냈다. 그리고 싱글맘이 됐다. 보다 '안전한 땅'에서 11살, 8살, 6살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마흔살의 그는 뉴질랜드로 떠났다. 이 상무는 "긴 경력단절의 시간이 이어졌고, 어떠한 기회나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던 그때가 끝이 막혀있는 터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살길에 대한 고민 끝에 늦은 나이에 법학도가 됐다. 무엇보다 가슴이 뛰는 일에 무게를 둔 결정이었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법대 입학허가서를 받아 놓고, 아이들을 등교시킨 뒤 혼자 찾은 법대 도서관에서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면서 "미리 사둔 교재와 자료를 펼치니 '아, 정말 하고 싶었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고 말했다.

이현경 SK건설 상무./김현민 기자 kimhyun81@

이현경 SK건설 상무./김현민 기자 kimhyun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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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ㆍ땀ㆍ눈물'…기회는 그렇게 찾아왔다= 경제적으로 홀가분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법대 재학 시절 학비는 융자에, 생활은 정부 보조금에 기댔다.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는 아이들이 고른 물건을 계산대에서 하나 둘 빼야했던 기억도 있다. 이 상무는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공부를 했고, 육아에 있어서만큼은 주변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했다"면서 "그래도 매일 저녁 꼭 아이들에게 밥과 국을 먹이고, 아침에는 내 것까지 4개의 도시락을 쌌다"고 전했다. 그야말로 피, 땀, 눈물 끝에 결국 변호사가 됐다.


연수원을 졸업하던 날 당시 여(女) 연수원장은 "여성 변호사는 서포터(조력자)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최초(1893년)의 땅에서 조차 유리천장은 존재했다. 다행히 늦은 나이에 변호사가 된 엄마에게 자녀들은 기꺼이 조력자가 돼줬다. '괴물 같았던' 사춘기도 있었지만, 그때 체득한 포용력은 조직생활에서 필요한 리더의 덕목으로 활용한다고. 그는 "아이를 키우면 마음이 넓어진다고들 하는데, 그게 다 찢어지면서 커지는 것"이라며 웃었다. 상법 변호사로 자리를 잡아갈 때 즈음 청와대의 한 자문 콘퍼런스에 참여하며 국내 기업들과도 자연스레 인연을 쌓았다. 그러다 10년여의 뉴질랜드 생활을 접고 그의 나의 마흔 일곱, SK건설에 입사한다. 국내 어느 곳보다 열린 문화를 가진 기업이었기에 이 상무는 빠르게 조직생활에 복귀할 수 있었다.


◆"회사의 명운이 달린 전장…성별은 의미없다"= SK건설에서 개발사업부문 소속 변호사로 근무하던 그는 계약실에 꾸려진 TF팀에 자원한다. 이 상무가 책임자 자리에 있는 계약실은 국내외 발주처 또는 하도급업체와의 계약을 총괄하는 부서다. 특히 공기(工期) 지연으로 발생하는 지체상금을 어느 쪽이 부담하느냐를 엄밀히 해석하고, 비용의 정산을 요청ㆍ설득하는 과정(클레임)이 핵심 업무다. 클레임으로 지난 5년간 연평균 1억5000만달러(약 1792억원) 정도를 받아냈다. 당시로서는 조직 내에서 생경했던 이 업무에 그는 '가슴이 뛰었기 때문'에 자진했다. 3명으로 출발한 TF는 현재 50여명 규모의 조직이 됐다.


"건설업 20~30년 업력의 임원들을 포함해 클레임 전문가는 없었고, 열심히만 한다면 대체 불가능한 전문가로서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심장이 두근하더라구요."


그러나 세계적으로도 성비가 기울어진 건설업계에서 어려움은 수시로 찾아왔다. 2014년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와의 클레임 협상 자리. 여성에겐 운전면허증도 발급되지 않았고, 회사 건물에는 여자 화장실도 찾기 힘들던 시기다. '여성인' 이 상무의 입장조차 막는 일도 있었다.


"뒷자리에 앉아만 있는 조건으로 회의에 참석하고도 어느새 앞에 나서서 얘기를 하고는 했어요. 그저 회사 명운이 달린 전장이라고 여겼어요. 전쟁 중에 남자 여자 가를 겨를이 있을까요. 목표에만 집중했고, 7개월간의 사투 끝에 거액의 보상을 받을 수 있었죠."


업무 현장에서의 기회는 평소에 본인의 장점과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잡을 수 있다고 이 상무는 말한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나이 들어 이직한 여자라는 약점보다 공부를 잘하고, 성실하다는 점에 집중했다. 장점과 단점은 그렇게 씨줄과 날줄처럼 단단히 엮여 '나'라는 직물을 만들어낸다. "다들 단점을 버리고 싶어하죠. 그러나 그조차도 있어야 직물이 짜이는 겁니다. 대신 각각의 장단점을 정확히, 잘 알고 있어야 하죠. 그렇게 자신을 촘촘하게 정비해놓으면 어느 곳에서도 두려울 것이 없어져요."






김현정 기자 alpha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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