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어사전] 이생망 -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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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조선 후기, 한 선비가 과거 1차 시험은 무난히 합격하는데 2차에서 낙방을 거듭하자 그길로 주막에 앉아 술을 들이켜기 시작한다. 취기가 오르니 분노 또한 함께 차올랐다. 선비는 술기운을 빌려 자신의 낙방 후기를 시로 남겼다. “세상살이 술 마시는 일과 같아/처음에는 따져가며 잔에 따른다/정신 놓고 술 백 병을 들이키면서/돼지처럼 씩씩대며 계속 마시지/산림에는 드넓은 거처가 많아/지혜론 이 진작에 찾아간다네/마음에만 품을 뿐 갈 수가 없어/하릴없이 남산 그늘 지키고 있네” 한 잔만 마셔야지, 하고 잡아든 술잔은 이내 병을 잡고 마신 채 끝나기 마련. 이번 생은 망했노라 고주망태가 된 낙방의 주인공은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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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망은 ‘이번 생은 망했어’의 줄임말로 사회와 국가, 삶과 죽음에 더 이상 기대와 희망이 없는 절망적 상황을 내포하고 있으며, 특히 경제난, 취업난에 내몰린 청년층을 중심으로 자주 회자되는 말이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올해 1월 발표한 대졸 예정자 취업 통계에 따르면 ‘정규직으로 취업했다’는 응답자는 전체 11.0%에 불과했고, ‘인턴 등 비정규직으로 취업했다’는 응답자는 10.0%, ‘아직 취업하지 못했다’는 응답자는 79.0%에 달했다. 시인 성동혁은 ‘속죄양’이란 시에서 “이번 삶은 천국 가는 길 겪는 긴 멀미인가요”라고 물었고, 또 시인 황지우는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에서 “나, 이번 생은 베렸어/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라며 자조했다. 반복되는 실패의 경험, 좀처럼 바로잡아지지 않는 기울어진 사회 구조가 청춘의 의지를 절망으로 손쉽게 바꿔놓고 있는 이 순간, 그들이 어린이였을 때 미처 해주지 못한 오랜 말빚을 사회는 갚아줘야 한다. “태어나길 정말 잘했어”란 진심 어린 응원을, 그리고 그 삶에서 작은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경제적 지원 제도 마련을 통해 도전과 성취의 경험을 사회가 심어줘야 할 것이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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