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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어스', 조던 필의 철 지난 아메리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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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어스', 조던 필의 철 지난 아메리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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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호와가 말한다. 재앙을 내릴 것이니 그들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어도 듣지 않을 것이다." 예레미야서 11장11절이다. 유다 백성의 파멸을 가리킨다. 죄악이 극에 달해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영화 '어스(US)'는 이 구절을 꽤나 차용한다. 오늘날 미국이 그만큼 타락과 부패로 점철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경고다. 그런데 누가 얼마나 큰 죄를 지어서 눈물의 회개까지 촉구하는 걸까. 답은 제목에 있다. 우리, 다시 말해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미국인들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윌슨 가족의 별장에 그들과 똑같이 생긴 가족이 찾아와 살해를 시도한다. 정부에서 파놓은 지하터널에서 숨죽여 지내던 복제인간들이다. 정치색이 더해진 공포물에서는 피해자의 면면을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잘못이나 허물을 조명해 주제를 부각하기 때문이다. 윌슨 가족에게서 별다른 문제는 보이지 않는다. 중산층 흑인 가정인데, 산타크루즈에 별장을 둘 만큼 여유로운 가정생활을 영위한다. 다만 아빠인 게이브(윈스턴 듀크)는 과시적 소비를 하는 경향이 있다. 체면치레하느라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모터보트를 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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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이런 자국민에게 장밋빛 환상을 심어 대통령이 됐다.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 정책이다. 지난 3월 의회에 제출한 예산안에서도 국방비용을 지난해보다 5% 증액하고, 미국ㆍ멕시코 국경장벽 건설에 추가로 86억 달러를 배정했다. 임기 초부터 꾸준히 마약과 각종 범죄, 이민자를 막기 위해 '강력한 장벽(powerful Wall)'이 필요하다고 주창한다. 어스에는 강력한 장벽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1986년 진행된 캠페인 '미국을 가로지르는 손'이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손에 손을 맞잡고 길게 띠처럼 늘어서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기금 모금을 독려했다. 협력하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스타일의 아이디어였다. 레이건은 친근한 언어와 강단이 있는 어조로 전통적인 미국을 회복하자고 주장해 보수층으로부터 인기를 끌었다.


어스를 연출한 조던 필 감독은 그 이면에 주목한다. 보여주기에 가까운 퍼포먼스는 본질적으로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며, 오히려 실제 현상을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래서 극 후반에 미국을 가로지르는 손을 정반대되는 분위기로 재배치한다. 복제인간들이 서로 손에 손을 맞잡고 길게 늘어서 있다.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인종과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실태를 향한 강한 비판이다. 행위의 주체인 이들의 얼굴을 미국인들과 똑같게 설정해 관객이 스스로를 돌아보게끔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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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면 장르적 특성을 활용한 효과적인 설득. 하지만 그의 정치관이 얼마나 수렴될 지에는 물음표가 붙는다. 리버럴(자유ㆍ진보주의자)의 이야기가 현실을 조금도 반영하지 않은 채 당위성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유복하다는 이유로 죄의식을 물을 수는 없다. 불법이민자와 난민을 모두 포용하는 것 또한 능사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사정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다. 난민을 수용하지는 않지만, 외국인근로자를 대거 고용하며 불법체류자의 추방에 소극적이다. 그래서 하위 계층 내국인과 외국인근로자가 일자리를 두고 생존경쟁을 벌이는 형국으로 치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자리의 질은 좋아지기 어렵다. 구체적인 삶과 지역까지 고민하는 정책이 요구된다.

필 감독은 철 지난 '아메리칸 드림'에 젖어 있다. 현재의 미국이 외국인근로자가 물밀듯이 들어와도 괴물처럼 일자리가 형성되고 지역경제가 팽창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런 생각이 고스란히 반영된 어스는 그가 끔찍이 싫어하는 트럼프를 오히려 도와주는 우둔한 선동이다. 민주당이 트럼프 지지로 돌아선 중서부 백인 노동자들을 포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첨단기업과 할리우드 연예인들의 후원을 받으며 호화 저택에서 사는 리버럴의 세상을 바꾸자는 외침을 힐빌리(미국 남부의 교육받지 못한 백인 노동계층)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민주당을 지지하는 예술인들이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소외된 이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준 이는 트럼프였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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