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라운드(UR). 마라케시. 1995년. 이 세 구절이 연상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다. 세계무역기구(WTO)다. 한국에서 UR는 쌀시장 개방과 관련한 소란으로 유명하지만 UR는 1994년 모로코 마라케시에서의 각료회의를 통해 1995년부터 WTO를 출범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세계무역을 총괄하는 세계무역기구가 '드디어' 탄생한 것이다. 그로부터 25년.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시기에 중국마저 2001년 WTO에 가입했으니 WTO는 탄탄한 국제기구로 기능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 WTO가 지금 죽었다는 말까지 나온다.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하나의 국제기구로서 WTO가 가지는 가장 큰 문제점은 일반적인 합의, 쉽게 말해 한 나라라도 동의하지 않으면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협상력이 약한 최빈 개발도상국은 이에 해당되지 않지만 WTO의 산파역할을 한 주요 나라들이 트집을 잡을 경우 모든 논의는 겉돌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WTO 상소기구 위원 선임 거부다. 2016년부터 시작된 이 거부로 WTO의 분쟁 해결 절차는 조만간 마비상태에 빠질 운명이다. 이런 딴지는 미국이 제소를 당한 66건의 무역분쟁에서(2017년 3월 기준) 미국이 승소한 것은 6건에 불과하다는 불만을 배경으로 한다. 미국의 논리는 단순하다. 개도국들이 WTO를 이용해 수출은 마음대로 늘리면서 WTO에 투명하게 통보도 하지 않고 각종의 무역규제와 비관세장벽을 활용해 수입을 사실상 규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불평은 신흥 개도국들, 그중에서도 중국의 국영무역기업과 각종의 보조금, 그리고 지식재산권(IP) 보호를 대상으로 한다. 미국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주요 2개국(G2)에 포함되는 나라가 왜 개도국에 포함돼 특혜를 받아야 하는가?" "개도국을 세분화하든지 그 정의를 달리해 차별이 없는'공정한' 무역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WTO가 이렇게 비틀거리니 WTO 출범 이후 안정되던 국제무역질서는 점입가경의 상태에 이르고 있다. 지난 20여년 각종의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FTA)이 성행했고, 최근에는 포괄적ㆍ점진적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이 타결되고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도 다시 거론되는가 하면 미국은 공공연히 일방주의적 무역정책을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책임을 미국에만 돌리는 것은 가혹하다. 예컨대 유럽연합(EU)과 일본 역시 미국처럼 아직 중국을 시장경제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탈출구는 없을까? 그렇지 않다. WTO를 새로 바꾸면 된다. 개도국을 새로이 분류하고, 무역규제조치의 WTO 통보 의무를 엄격히 규정하고, 분쟁해결절차를 새로이 개선하고, 무엇보다 일반적인 합의라는 WTO 의사결정 방식을 변경하면 된다. 아, 하나가 빠졌다. 새롭게 떠오르는 디지털무역과 전자상거래, 국제 간의 데이터 이동,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새로운 국제규약을 만드는 일이다. 과거의 잘못을 빠르게 고치고 미래의 문제를 미리 대비하면 된다. 나는 이것을 WTO 2.0이라고 부르고 싶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WTO에 대한 개선 논의는 주요 20개국(G20), 캐나다와 주요 선진국을 대상으로 꾸준히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논의의 장을 봐도 세계 6위의 수출국인 한국의 역할과 제언은 보이지 않는다. 오랜 전부터 WTO 2.0을 주창해온 필자 입장으로서는 한국의 이런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 정도의 국제적 위상이라면 한국이 WTO 2.0의 시안을 준비해서 주도적으로 움직여도 되지 않을까? 통상교섭본부가 눈앞의 현안 때문에 바쁘다면 차관급 통상전문가가 넘치는 외교부라도 이 문제에 나서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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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홍 부산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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