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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부모를 고소한 아이, 은총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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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딘 라바키 감독 영화 '가버나움'

[이종길의 영화읽기]부모를 고소한 아이, 은총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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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태양이 내리쬐어도 암울하고 칙칙한 판자촌. 가까운 도심의 콘크리트 건물들도 하나같이 폐허처럼 황량하고 적막하다. 아이들은 관심이 없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골목을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나무로 만든 총으로 서로를 겨누다가 유기된 물건들을 때려 부순다. 한적한 건물에서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웃음꽃을 피운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다. 중동전쟁 뒤에도 내분과 외침이 끊이지 않는다.
경제 사정도 좋지 않다. 세계에서 부채가 세 번째로 많다. 처참한 실상은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 근처만 가도 여실히 나타난다. 피난처가 필요한 사람들과 빈곤한 레바논인들이 가난에 찌들어 산다. 하나같이 내전과 외국의 간섭에 희생된 기억으로 얼룩져 있다. 레바논 정부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추방했으나 남겨진 이들을 통합해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국제인권연합은 이들의 주거 여건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하다. 좁은 공간에 밀집해 사는 팔레스타인 난민은 새 캠프를 짓기는커녕 기존의 집을 확장하거나 파손된 캠프를 다시 짓는 것조차 금지되어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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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딘 라바키(45) 감독의 영화 '가버나움'은 열두 살 어린아이의 눈으로 비참한 실태를 목도한다. 가버나움은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의 북쪽에 있는 마을. 예수의 주요 활동지로 유명하다. 나병환자를 치료하는 등 눈부신 이적으로 신성과 전지전능을 증명했다. 아름다웠던 도시는 호숫가의 종려나무들 속에 폐허 더미로 남았다. 7세기 초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을 받아 저주의 도시로 전락했다. 예수의 예언대로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그곳들을 꾸짖으셨다. (중략)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베푼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다면, 그 도시는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0~25)."

주인공 자인(자인 알 라피아)은 베이루트에 산다. 나이는 열두 살로 추정된다.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서류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학교도 다니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과일주스를 팔거나 가스탱크를 배달하며 푼돈을 번다. 그는 온갖 어려움에도 굳세고 끈덕지게 버티지만 끝내 가출한다. 부모가 한 살 터울 여동생을 삼촌뻘 되는 아저씨에게 팔아넘겼다. 레바논에서는 아홉 살 이상의 남녀도 부모의 동의가 있으면 결혼할 수 있다. 자인은 에티오피아 출신 미혼모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을 만나 숙식을 해결한다.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지만 잠시나마 위안을 찾는다. 그녀의 자식 요나스(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와 놀아주면서 웃음을 회복한다. 그러나 라힐이 보호소에 수감되면서 어른들도 해내기 힘든 육아를 감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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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은 비슷한 주제의식을 가진 영화들과 달리 자인을 애늙은이로 포장하지 않는다. 갖가지 어려움을 비추면서 어린아이들이 느낄 법한 감정을 포착하는데 주력한다. 레바논의 현실을 자각하자는 호소다. 절실한 마음은 법정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칼로 사람을 찔러 루미에 소년 교도소에 수감된 처지에 부모를 고소한다.

"왜 부모를 고소했죠?"
"저를 낳아줘서요."

어른들이 제각각 변명을 늘어놓지만 자인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경고다. 예수의 예언대로 은총은 각성한 뒤에나 기대할 수 있다. 자인은 웃음을 되찾을 수 있을까. 베이루트 시민들은 압제 하에 있고 형편없이 초라하고 고달픈 삶을 사는 아랍인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오랫동안 강인하게 보석 같은 열정을 불태우며 살았다. 타락과 방탕함에서조차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걸출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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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 석학 에드워드 사이드도 저서 '애프터 더 라스트 스카이'에서 이 점에 주목한다. "암흑의 시기에도 위안 삼을 수 있는 것은, 베이루트가 전에도 혼란을 딛고 일어섰으니 이런 재앙적인 파괴도 다시 한 번 딛고 일어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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