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윤재웅의 행인일기 26] 로댕 박물관 정원에서

뉴스듣기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오귀스트 로댕. 프랑스 역사에 남을 한 사람의 예술가를 꼽으라면 첫째 자리를 차지할 조각가입니다. 그의 손이 지나간 돌덩어리들은 생명이 새로 붙어서 금시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지요. 하지만 그가 진정한 예술가인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숭고한 아름다움과 처연한 고통이 동거하는 육체의 탄생은 로댕 특유의 철학입니다. 신의 몸과 인간의 살을 함께 보여주는 건 천재라고 다 되는 게 아닙니다. 유작 6천 점. 그의 예술 평생이 잘 보존된 로댕 박물관을 찾아갑니다.

1728년에 지어진 집. 처음엔 파리 사교의 중심지였습니다. 교황청 대사관, 수도원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유명 예술가들에게 임대를 주기도 했죠. 로댕도 여기 살았습니다. 나중에 이 집을 사들인 정부가 철거하려 하자 로댕은 자신의 작품을 이 집에서 전시하는 조건으로 기증하게 됩니다. 로댕 박물관 탄생의 사연입니다.
작품 하나하나가 걸작이지만 정원이 특히 아름답습니다. 축구장보다 기다란 정원이 저택 뒤로 시원하게 펼쳐집니다. 남향으로 쭉 뻗은 푸른 잔디밭. 가장자리의 작은 정원수들과 그 바깥쪽의 큰 나무들. 큰 나무들 사이 여기저기 툭 툭 놓여 있는 작품들. 좁은 실내 공간을 뱅뱅 돌며 마주치는 작품들이 아니라 숲속을 산책하다 만나는 19세기 사람들 같습니다. 정원의 빈 공간에 작품을 배치했다기보다 작품을 위한 무대로 정원을 활용했다는 느낌입니다.

실내 전시장을 돌다가 지친 이들은 정원으로 나와 산책할 수 있습니다. 한나절 있을 요량으로 입장하면 간단한 요깃거리도 챙겨가는 게 좋습니다. 벤치가 많이 있어서 자유롭게 앉아 먹고 마시며 쉴 수 있습니다. 로댕의 작품 앞에 서면 인간은 무엇인가를 줄기차게 물어오는 작가의 질문에 숨이 턱턱 막히니까요. 뜨거운 눈과 더운 가슴을 종종 식혀야 합니다. 하지만 저택의 제일 앞과 뒤쪽에 있는 작품들을 보면 가슴 식히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걸 금세 눈치 채게 됩니다. 로댕이 인간의 형상을 재현하는 조각가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재현하는 예술가라는 걸 발견하게 되니까 말입니다.

정원 끝에 물 마른 동그란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 특이한 조각이 있습니다. <우골리노>.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러시아에서 온 소녀들은 터지는 꽃봉오리처럼 연신 깔깔거립니다. 깔깔깔깔…, 깔깔깔깔….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의 신들이 지상의 가엾은 인간을 바라보며 웃는 소리 같기도 합니다.
우골리노(Ugolino)는 13세기 이탈리아 내전에서 반역죄를 선고받습니다. 그는 두 아들과 손자들과 함께 탑에 갇혔는데 아사 상태의 아이들이 죽어가자 그들의 시신을 먹으며 연명합니다. 그러나 자신도 결국 굶어죽게 되는 인물이지요. 단테의 『신곡』에 보면 그는 반인륜 행위로 인해 지옥에 떨어집니다. 끔찍한 형벌 속에 놓인 죄수가 굶어죽은 자기 아이들을 잡아먹는 장면을 로댕은 묵묵히 보여줍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생존이 무엇인지 되묻게 되는군요. 아름다운 정원에 지옥이 함께 있네요. 주변에는 꽃피는 소녀들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팝콘 터지듯 연신 터집니다. 우골리노야, 너 사람아, 너도 배고프니 할 수 없구나! 깔깔깔깔…, 깔깔깔깔…. 신들이 소녀들 속으로 들어와 이렇게 웃습니다.

저택 입구, <우골리노>의 반대편에 또 다른 지옥이 있습니다. <칼레의 시민>입니다. 14세기 영국의 왕 에드워드3세는 프랑스의 칼레를 함락하기 직전 모종의 제안을 하지요. ‘도시의 명망가 여섯 명이 목에 밧줄을 걸고 자발적으로 찾아와 성의 열쇠를 내준 후 그 밧줄로 처형을 당하면 모든 시민을 살려주겠다.’ 정복자는 칼레 사람들의 마음에 지옥을 만들어 심습니다. 시민들은 충격에 빠집니다. 그때 최고의 부자 생 피에르가 나서죠. 신부, 변호사가 뒤따라서 마침내 여섯 명의 ‘거룩한 희생양’이 승리한 정복자 앞에 나섭니다. 상황은 얄궂습니다. ‘저들을 살려주세요.’ 임신한 영국의 왕비가 간청을 하자 왕은 여섯 명 전부를 풀어주었다는군요.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후대에 의해 윤색된 허구라고 합니다. 누군가 이야기에 재미를 불어넣고 애국심을 고취시키려 가공했다는 거죠. 바다의 거품 속에서 비너스가 탄생하듯이, 이 스토리 속에서는 희생정신이 태어납니다. 과연, 500년쯤 지난 뒤에 칼레 시장은 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작품을 당대 최고의 조각가에게 부탁하는군요. 로댕은 희생정신보다 더 고결한 철학을 작품 속에 새겨 넣지요.

그가 재현한 여섯 명의 시민은 죽음 앞에서 갈등을 드러내는 고뇌에 찬 인간들입니다. 멸사봉공의 영웅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인간, 지옥의 문 앞에 서 있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죠. 로댕은 조작된 이데올로기 보다는 인간의 진실을 알리는 쪽을 택합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나오는 숭고함. 그때가 바로 신이 깃드는 진정한 순간! 이를 알아차리는 건 감상자의 몫입니다.

문학평론가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강릉 해안도로에 정체모를 빨간색 외제차…"여기서 사진 찍으라고?"

    #국내이슈

  • "죽음이 아니라 자유 위한 것"…전신마비 변호사 페루서 첫 안락사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대학 나온 미모의 26세 女 "돼지 키우며 월 114만원 벌지만 행복"

    #해외이슈

  •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PICK

  • "쓰임새는 고객이 정한다" 현대차가 제시하는 미래 상용차 미리보니 매끈한 뒤태로 600㎞ 달린다…쿠페형 폴스타4 6월 출시 마지막 V10 내연기관 람보르기니…'우라칸STJ' 출시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 용어]'비흡연 세대 법'으로 들끓는 영국 사회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