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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국어사전'을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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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마지막 토요일은 소년 시절의 벗들과 함께 보냈습니다. 집들이를 겸한 송년 모임이었습니다. 여섯 부부가 모였습니다. 갖가지 선물도 따라왔습니다. 충청도에서 농사를 짓는 친구는 햅쌀을 가져왔더군요. 물건마다 담겨있는 우정과 사랑의 뜻을 헤아리며 늦도록 웃고 떠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집들이 선물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제 기억의 맨 밑바닥엔 성냥과 양초가 있습니다. 그것들에 붙어 다니던 말들이 이러했지요. "불처럼 일어나기를." "어둠일랑 멀리 쫓아버리길." "광명이 가득하기를." 생각해보면 시대가 만든 덕담이었습니다. 어둡고 고단한 시간들을 어서 벗어버리자는 기도의 언어였습니다.
한 세월엔 '가루비누'라고 불리던 세제 선물이 유행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술술 풀리길 바라며 건네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런 주문은 두루마리 화장지에도 이어졌습니다. 이른바 '유감주술(類感呪術)'이었습니다. 비슷한 사물이나 형상에 기대고 빗대어, 원하는 일이 이뤄지길 바라는 믿음이나 기원이지요.

저는 새집을 장만한 친구에게 '국어사전'을 주고 왔습니다. 모두 의아해하더군요. 얼른 이런 설명을 가져다 붙였습니다. "사전은 말의 집입니다. 오늘 이 집 식구들이 꿈꾸는 단어가 이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좋아하는 말, 사랑하는 말, 서로에게 주고 싶은 말, 세상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말. 모쪼록 그런 말들의 주인이 되시기를!"

제 '사전 선물'의 내력은 제법 오래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사무실이나 개업한 상점을 찾아갈 때면 곧잘 그것을 들고 갑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행운목이나 난초화분과 다르지 않습니다. 축하의 말이 적힌 벽시계나 대형거울과도 차이가 없습니다. 성냥과 양초 또는 세제나 화장지와 같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사전에는 세상 모든 축하의 선물과 인사가 품는 말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물론 선량한 말들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환란과 고통의 말들도 있고, 좌절과 슬픔의 어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단어들이 떼로 덤벼도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기운차고 눈부신 말들이 있습니다. 투지와 용기와 희망과 성취 그리고 꿈과 사랑.

그래서였을까요. 한 시절의 우등상 개근상은 으레 그것이었습니다. 옥편(玉篇)이거나 국어사전, 영어사전. 실용성만큼이나 상징성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전은 생각의 곳간입니다. 모든 도구와 연장과 공구가 빠짐없이 들어 있습니다. 거기엔 바위산도 깨뜨릴 철퇴가 있고, 철벽도 뚫어낼 다이아몬드 칼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송두리째 잃었을 때 목숨을 걸고 사전을 만들던 사람들 생각도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서슬 퍼런 감시의 눈을 피해 낱말카드 한 장 한 장을 피땀으로 모으고 지켜낸 이들. 이극로, 이윤재, 이희승, 정인승, 최현배…. 그분들이 눈물겹게 일으켜 세우려던 말의 창고, '말광(사전)'은 어쩌면 '무기고'였습니다.

조선어학회의 싸움은 조용한 항일투쟁이었습니다. 임시정부 요원으로 독립운동을 매섭게 했던 김두봉(金枓奉) 선생도 조선어사전 '말모이' 편찬에 열정적 활동을 한 분이었지요. 그뿐이겠습니까. 셀 수 없이 많은 학자들이 우리말과 글에 몸과 마음을 바쳤습니다. 그것은 전쟁이었습니다. 그 피어린 기록을 전시회('사전의 재발견')로, 영화('말모이')로 만나게 된 것은 무척 반가운 일입니다. 올해는 '3ㆍ1 운동 100주년'. 각계에서 의미 있는 구상과 준비들이 한창인 모양입니다. 바라건대 국어사전에 관한 논의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말모이'가 자꾸 '말의 무덤'이 되어가는 것 같아 안쓰럽습니다.

윤제림의 제안. 졸업, 입학, 승진, 이사, 개업…. 올해엔 '국어사전' 선물이 어떨까요.

윤제림 시인 · 서울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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