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원의 시와 음악의 황홀 속으로 4]판테라(Pantera)
헤비 메탈의 긍정적 감응력이 있다면? 그것은 분노와 증오를 누그러뜨린다는 (사실 같지 않은) 사실. 파괴적인 금속 소음이 인성과 감성을 파괴한다고, 사탄의 강림이라고 준엄하게 가르치는 사람들도 많다. 음악이 절대악에 사용된 역사적 예는 따로 있다. 나치가 아우슈비츠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학살의 배경 음악으로 사용한 사실 말이다. 중금속(heavy metal, 重金屬) 음악이 청년들을 악에 빠뜨리고 그들을 물리적으로 파괴했다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메탈은 나를 착하게 만드는 음악이다. 나에게는 이 금속의 열광을 거부할 능력이 없다. 붉은 적의를 초록 평화로 화학 변화시키는 힘 앞에서 '시끄럽다'는, 단연코, 틀린 말이다.
애호하는 음악에는 청자만의 고유한 추억이 강렬하게 들러붙어 있을 때가 많다. 그 사람과 헤어진 날, 나의 슬픔을 위로해준 제프 벅클리(Jeff Buckley)의 <라일락 와인(Lilac Wine)>보다 절실하게 아름다운 육성을 다시 찾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판테라의 <유서 2(Suicide Note 2)>를 듣는다. 아프다. 깨진다. 분해와 분열이 동시에 진행된다. 나는 가루가 된다. 바람 속의 먼지가 된다. 쪼개진 음절이 되고, 흰 소음이 되고 만다. 두 잇, 두 잇, 트라이 잇(Do it, do it, try it). 가끔 삶에 무릎을 꿇고 싶을 때가 찾아온다. 무엇을 한다 해도 '나'를 용서하기 힘들 때, 적의로 가득 찬 세상의 주먹에 한 대 얻어맞았을 때, 무엇인가를 파괴하고 싶지만 그 목표나 대상이 잘 보이지 않을 때, 한 작자를 흠씬 패주고 싶을 때, 토하도록 술을 마시기도 하고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며 엉엉 울기도 한다. 뭉개지고 싶을 때, 멍든 영혼을 쉬게 하고 싶을 때, 어떤 실패 때문에 녹아내리도록 울고 싶을 때, <유서 1, 2>를 들으면서, 찌질한 나에게 보내는 마지막 글을 상상해보곤 한다. 발라드 '노트 1'에서 메탈 '노트 2'로 급변할 때, 나의 혈압은 상승하고, 필 안젤모(Phil Anselmo)가 악을 쓰면서 비루한 이 세계를 두드려 부술 때, 나는 멀쩡해져서 '지금, 이곳'으로 돌아온다. 파워(power)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이 그루브 메탈(groove metal) 밴드는 자살을 조장 또는 방관하는 가사와 상관 없이 청자의 감정을 순화시킨다. 20대 중반을 군대에서 길게 보낸 나는 그들의 <25년>을 들을 때마다 여전히 얼룩무늬 군복을 입고 어깨에 힘을 주고 담배를 꼬나물고 전투모를 삐딱하게 쓰고 숫자가 들어가는 욕을 하고 싶어진다. '다시 한번 더 나를 괴롭히면, 그냥 확……'
판테라는 <<저 머나먼 쪽으로(Far Beyond Driven)>>, 1994년으로, 나를 데려간다. 강원도 홍천 11사단 포병대대에서 만난 판테라. 토요일 오후 중식 이동 시간에 그들을 공기 중에 흘려보냈다. 연병장에 울려 퍼지던 판테라의 <5분 동안 혼자인데(5 Minutes Alone)>. 잠시 후 위병소 옆 관사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대대장이 말했다. 어떤 새×야, 당장 끄라고 해. 몰랐다. 대대장이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대대원들도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 젊은 군인들은 룰라의 김지현에게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때 김건모의 레개 <핑계>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판테라는 판이나 트는, 신촌 일대의, 어두운 술집에서나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헤비 메탈은 소수가 즐기는 음악이다. 첫 번째 이유는 시끄럽다, 두 번째 이유는 반사회적 또는 반종교적 또는 반체제적이라고 해서 박해(?)받는 음악 헤비 메탈.
판테라의 음악은 '정말로' 시끄럽다. 소리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리의 부피가 커서 시끄럽다. 4인조 메탈 밴드이지만 원 기타. 다임백 대럴(Dimebag Darrell)이 연주하는 기타는 쉴 틈 없이, 촘촘하게, 금속성 사운드로 공간을 채운다. 금속이 파동친다. 그는 기타 한 대로 메탈 리프를 축조(築造)하기 위해 더욱 더 격렬하게 연주한다. 다임백은 2004년 12월 8일 공연 중에 팬이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와미 바(Whammy Bar)를 사용하여 징징 울리는 소음을 증폭한 연주가 돋보이는 노래 <되기(Becoming)>. 패배와 굴욕으로 얼룩진 삶을 박차고 일어나 더 강한 존재가 되겠다는 다짐이 상스럽고 거친 단어로 표현되었다. "나는 뱀눈을 지닌 채 다시 태어났어." 지금의 삶보다 나아질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 판테라의 '되기'는 이상한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뱀의 신체를 빌어 새로운 존재가 되겠다는 청년의 들끓는 절규는 철학의 추상성을 격파한다.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할 수 없었던 이질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지닐 수 있다면, 헤비 메탈은 즐기고도 남을 음악이 될 것이다.
더욱 강력한 일곱 번째 곡 <살육당한(Slaughtered)>이 따라온다. "당신의 신성한 암퇘지들이 남겨져 있어, 살육당하고 살육당한……" 같은 가사가 서늘하다. 극단적인 가사의 공격성에도 불구하고, 판테라의 앨범 <<파 비욘드 드리븐>>은 아트 헤비 메탈이다. 메탈리카(Metallica)의 네 번째 앨범 <<그리고 모두에게 정의를(…And Justice For All)>>은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완벽한 짜임새를 통해 스래시 메탈(thrash metal)에 총체적 예술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게 했다. 헤비 메탈을 헤드뱅잉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경청해야 하는 수준을 메탈리카가 이룩했는데, 94년에 선보인 판테라의 7번째 정규 앨범 역시 그러한 수준을 펼쳐 보인다. 1번 곡 <힘 너머의 힘(Strength Beyond Strength)>부터 4번 곡 <아임 브로큰(I'm Broken)>을 통과, 잠깐의 휴지기가 지나고, 7번부터 11번 <거부의 고통(Throes Of Rejection)>에 이르는 과정이 끝날 즈음, 청자의 귀는 두드려 맞은 것처럼 얼얼해진다. 뚫린 것처럼 시원해진다. 필 안젤모의 허리 통증 때문에 가사가 씌어진 <아임 브로큰>은 인상적인 기타 리프가 몸의 전압을 일시에 상승시키는 곡이다. '브로큰'을 '파산하다'로 바꿔도 틀리지는 않지만, 직역해서 '나는 부러졌어'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시적이다. 나는 부러졌어, 내 인생은 깨졌어, 인생이 작살났어 등등으로 의미를 조금씩 변경해보면 '나'의 상황과 감정에 들어맞는 경우가 종종 찾아온다. 취업에 실패했거나 사랑이 조각난 청년이 입술을 떨며 나지막하게 내뱉는 독백 "나는 부러졌어"를 떠올린다. 분노가 응축된 이 짧은 문장 속에 담긴 감정의 진폭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판테라의 <나는 부러졌어>가 시의 한 구절을 연상시키는 이유가 이것이다.
2001년 5월 6일 올림픽공원 테니스 경기장의 라이브. 나는 그때 그곳에서 이빨을 드러낸 채 그르렁거리는 판테라의 거친 숨과 금속들의 울부짖음과 관객들의 찌르는 비명이 뒤섞인 유쾌한 난장판 속에서 술을 마시고 싶었다.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주최 측의 반복되는 안내 방송. 과격한 밴드가 무대에 등장할 것인데 관객 여러분들은 흥분하면 안된다, 만일의 폭력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교조적인 말들, 쏟아지고. 진짜 의무경찰들이 등장했다.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는 장면 하나. 모든 이들의 점프하기. 사랑이 불러오는 고통을 발라드로 시작해서 뜨거운 외침으로 고양시키는 <이 사랑(This Love)>에 연결된 <걸어라(Walk)>. 첫 소절이 나오자마자 모두는 일어서고, 모두는 뛰어오르기 시작. 하늘로 치솟으면서 함께 외쳤던, "리―스펙트, ㅤㅇㅝㅋ!" 경기장이 흔들렸을 것이다. 노래가 지나간 뒤의 갈증. 채워질 수 없는 '텅 빈 청춘'을 관통하던 판테라. 젊음의 열기를 금속의 열기가 잠재웠다. 이열치열(以熱治熱), 이통치통(以痛治痛), 이고치고(以孤治孤), 이애치애(以哀治哀). 고통은 고통으로, 외로움은 외로움으로, 슬픔은 슬픔으로 다스려라!
지금도 그 자리에 나는 서 있다. 판테라가 다가온다. "당신은 우리를 ×나게 적대적이게 만들어(You're making us f**king hostile)." 나는 판테라의 <×나게 적대적인(f**king hostile)>을 청춘 송가의 하나로 생각한다. 동해로 놀러가던 2000년 8월 초순, 미시령 위에서 파란 바다를 눈 밑에 두었을 때, 차창 밖으로 퍼져 나가던 이 노래는 아드레날린 펌프였다. 오늘밤 '빡쎄게' 마셔보는 거야!
절망과 좌절과 실패와 공포의 총량은 오늘도 여전하다. 이 세계는 나아질 것 같지 않다. 한 발 내딛은 것 같은데, 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이다. 몸도 마음도 약해지고 있다. 희망, 행복, 미래 같은 클리셰(cliche)조차 낯설어진 오늘, 다시 판테라를 듣는다. 내게 고통이 있었다. 그것이 기록되었다. 그 물증이 있다. 판테라의 작품 제목을 따온 시 한 편이 있다.
(……)
경도(京都)의 밤, 피의 얼굴로 기록에 골몰한다, 나를 용서하길, 나의 절멸을 상상하고, 그대는 행복해하기를, 사랑이 파괴된 후, 압천(鴨川)의 물소리처럼 욕망이 부글거릴 때, 내 고통의 흔적을 아로새긴 물결의 수효를 기억하라
내가 나를 속이고, (사랑의 대칭), 그대가 나를 속이고 난 후 우리는, 조개껍질처럼 괄약근처럼, 우아한 침몰을 위해, 모래의 입으로, 오늘의 파괴를 경축하며, 새로운 패망의 역사를 위해 서로를 파(破)한 후, 끈끈이를 분비하고, 같이[假齒], 패류의 화석이 되자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텀블러에 담아 입 대고 마셨는데…24시간 지난 후...
이마에 압정을 박고 더 긴 후회를 시작할 것이다
―장석원, <수어사이드 노트(suicide note)> 부분, 시집 <<리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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