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도 훨씬 넘은 꽤 오래 전 일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나는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다른 날과 달리 조금 일찍 퇴근해 아이를 데리러 갔던 어느 날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일찍 갔기 때문에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장면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이 선생님과 방금 어떤 활동을 끝내는 참이었다. 열댓 명쯤 되는 아이들이 저마다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거나 머리에 쓰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곧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엄마 우리 오늘 병원 놀이 했어요'라며 말하는 딸의 손을 잡으면서 둘러보니 아니 이럴 수가! 남자 아이들은 모두 청진기를, 여자 아이들은 모두 간호사 캡을 가지고 있었다. 이게 과연 아이들 스스로 선택한 결과일까? 왜 청진기를 든 여자아이나 간호사 캡을 쓴 남자아이는 단 한 명도 없는 걸까? 우리는, 세상은 이렇게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성차별적 인간으로 키워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 아마도 선생님은 아이들이 스스로 만든 작품을 활용한 역할극을 통해 사회성을 길러주겠다는 교육적 신념을 가지고 활동을 지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생님이 생각하는 사회성에는 이미 성역할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차별의식이 전제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큰 아이가 독립을 했다. 난생 처음 가족과 떨어져 자기만의 생활공간을 갖게 된 것이다. 이사와 짐 정리가 끝난 얼마 후 가족들과 집들이,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방들이를 하였다. 우리의 방문시간을 확인하는 전화 말미에 딸이 밥은 시켜서 먹자고 하였다. 전화를 끊고 나니 반찬은 없어도 생전 처음 독립한 딸이 퍼주는 따뜻한 밥을 기대하고 있었던 나는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에 슬그머니 부아가 났다. 그래도 집들이인데 성의도 없다며 한 마디 하는 소리를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딸아이에게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화기 너머로 딸의 불편해하는 마음이 전해져 왔다. 순간 내 머릿속에 만일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다면? 하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어쩌면 아들이었다면 나는 시켜서 먹거나 나가서 먹자는 아들의 얘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그날 나는 내 안에 깊이 뿌리내린 성차별 의식을 깨닫고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나는 젊었을 때 나름 여성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한 때는 꽤 래디컬한 페미니스트이기도 했었건만…. 과연 나는 20여 년 전 어린이집 선생님과 뭐가 다른가. 내 안에 여전히 DNA화 되어 있는 성차별의식을 발견하고 몹시 놀랐고 또 부끄러웠다.
최근 어느 유명 감독과 연기파 배우들이 만든 영화가 여성을 성과 폭력의 일방적 피해자로 소비하여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다. 감독은 영화적 설정상 필요하다고 판단했지만 문제제기를 받고 보니 젠더 문제에 대해 무지했었다고 고백했다. 그런가 하면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 여교사가 운동장이 아이들 모두의 공간이 되지 못하고 주로 남학생들의 공간이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후 인터넷상에서 공격을 받고 신상까지 털리는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기사도 올라왔다.
가난한 이들이 부자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당이나 후보에게 투표하는 행위를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한심해하고 답답해하는 내 안에도 같은 문제가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여성 당사자인 나조차 이럴진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을 성과 폭력 대상으로 소비하는 영화가 나오고 성평등 교육을 시킨 여교사를 공격해대는 일이 사라지길 바라는 일은 요원한 일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의식이 바뀌고, 사회 제도가 바뀌고 무엇보다 성차별이 당연시 여겨지는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강민정 (사)징검다리 교육공동체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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