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외길 건설엔지니어'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의 주문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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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월 미국국가정보위원회(NIC; National Intelligence Council)에서는 ‘글로벌 트렌드- 진보의 역설’이라는 책을 공개 발간하였고, 한국에서도 신속하게 2월20일 번역본이 나왔습니다. NIC는 미국의 16개 정보기관을 통할하는 국가정보국장(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 산하 직속기관으로서, 4년마다 이 책을 통하여 ‘향후 20년 어떤 권력과 선택이 이 세계를 어떻게 끌고갈 것인가’를 조망합니다. ‘진보의 역설’이라는 제목은, 기술의 진보에 힘입어 산업화와 정보화가 매우 급속히 진행됨으로써 기회가 더 풍부해지지만, 동시에 더 위험한 국면도 함께 전개되는 현상을 함축한 것입니다.

책 앞머리 요약문에서 “지금 우리는 역설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 5년 동안 나라마다 국내외적으로 긴장이 고조될 것이고, 중국과 러시아는 대담해지는 한편 역내 침략자들(regional aggressors)과 비국가행위자들(nonstate actors)은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틈새를 찾을 것이다. 많은 나라에서 국내 상황의 악화가 지속될 것이지만, 단기적 위험을 초래하는 트렌드가 장기적으로는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는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에서 발간한 '글로벌 트렌드'

◆미국 국가정보위원회에서 발간한 '글로벌 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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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정보보고서답게 매우 간결하고 객관적인 표현으로 쓰여 있습니다. 본문보다 긴 두 개 의 부록을 붙였는데, 한 축은 지역별로 10곳으로 분류하고 다른 축은 주제별로 8가지로 분류하여 기술하고 있어 매우 유용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를 꼽으라면 단연 기술(technology)입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 과거와 다른 양상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기술의 발전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특히 정보화 기술의 발전은 경제는 물론, 정치와 사회, 군사력 등 모든 면에서 풍요와 위기를 동시에 가져 왔고 이것을 어떻게 운용할 것이냐는 전적으로 지도자와 국민들 간의 믿음과 슬기로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최고권력자는 매우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는 국민들이 깨어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정치를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나라를 쉽게 다스리려면 반대로 하면 되겠지요. 2600년 전 노자는 도덕경에서 ‘민다이기 방가자혼(民多利器 邦家滋昏)’이라고 설파했습니다. 백성에게 문명의 이기가 많을수록 나라는 혼란에 빠진다는 얘기입니다. 한글을 창제할 당시 많은 신하들이 반대한 이유 중에도 그런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아닌 인민의 대표로서의 최고권력자이던 마오쩌뚱은 어려운 한자를 버리고 간체(簡體)를 도입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문맹과 관련이 없다고 하지만 지금 세계 제2의 대국이 된 중국을 보면 대단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국가정보위원회 의장의 서한에는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있는데, 이 책을 비밀로 분류하지 않는 것은 보안성 검토에 1~2년 이상을 내다보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 합니다. 세계 최고 최강의 정보력을 갖고 있는 나라다운 대담함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당연히 고급정보는 따로 갖고 있을 것이고, 이 책을 공개함으로써 경쟁국이나 적대적인 국가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따져보았을 것입니다. 영어가 영국사람만의 말이 아닌 것처럼 지금은 미국의 제도나 시스템들도 미국만의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정치 행태는 부분적으로 한국의 그것보다 조금 낫거나 또는 더 부패했을지 몰라도 그 사회구성원들은 우리보다 나은 함께 사는 지혜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한국에 관한 부분들을 발췌해 경제와 안보 부분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경제, 사회


-한국의 생산가능인구는 줄어든다. 생산인구규모가 컸을 때 한국은 인적 자본 확충, 높은 수준의 기술 영역 창출, 성공적 도시화를 이루어 민간과 정부 모두 부를 축적했고,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 안정에 기여하였다.


-유럽보다 복지 혜택이 적은 동아시아 고령화 국가의 주민들은 복지 개선에 돈을 더 낼 의사가 있지만, 그래도 정부가 일정 수준의 보장을 해 주기 원하고 있다.


-한국과 같은 산업화된 민주국가 지도자들은 중산층의 행복감을 회복할 방안을 찾으면서, 한편으로는 민중영합주의와 토착주의의 충동을 누그러뜨리려고 시도할 것이다.


◆국방, 안보


- 한국과 일본 모두 안보역량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미국의 안보우산을 유지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한반도 주변의 긴장이 고조되어 한·미·일 3국은 안보위협에 대한 공통의 인센티브를 갖고 있지만 상호불신과 과거 역사의 경험이 협력을 어렵게 하고 있다.


- 북한의 ICBM개발을 포함한 핵무력 과시는 또 다른 나라의 핵무장을 부추길 수 있다.


- 한·중·일 3국은 자국의 안보 역량을 개선하면서도 동시에 경제적 상호의존상태는 계속될 것이다. 방어적 조치가 공격적인 것으로 해석될 때 일어날 수 있는 상호간 군비 확장은 피해야 한다.


-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관심의 증가, 일본의 방위정책 변화, 북한의 핵프로그램 등과 관련하여 대국굴기(大國?起)에 대한 더 강한 반발이 생기기 전에 더 큰 영향력을 확보하려 할 것이다.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 푸념 삼아 했던 ‘엽전은 안돼’라는 말이 지금은 없어졌지요. 하지만 젊은 시절 저에게는 참 듣기 싫은 자조적 말이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유심히 본 것도 지금 우리 사회의 현상이 우리만의 것인가, 아니면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그런가, 아니면 어떤 상태나 수준에서 일어나는 현상인가에 대한 궁금함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늘 이공계 출신이라는 핑계로 사회현상들에 대하여 잘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고, 언행도 겸손해서가 아니라 그런 이유 때문에 조심스러워 했습니다. 1970년 전태일 사건 당시 서울YMCA 대학생부 부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강당에서 대학생부 주최 관련 집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피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사건의 실체도 제대로 모르면서 왜 내가 도망을 가나’ 하는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너무 세상과 동떨어져 살고 있는 나를 처음 발견한 것이지요.


돌이켜 보면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우리 세대들은 학교에서 정치나 경제 사상교육 등은 공개적이고 체계적으로 받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못 받은 정도가 아니라 관련된 단어만 입에 담아도 거의 공포를 느낄 정도로 살벌한 때였습니다.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가 그리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학생들은 정권이 원하는 주입식 교육에 따라야 원하는 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 한편에서는 동아리들이 몰래 복사본을 돌려보며 그들만의 사상적 내공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정상적 소통을 막은 결과 균형적 감각을 키우지 못한 것이 오늘의 사태를 불러 온 시발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작년 가을부터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정치, 안보, 경제 등의 중차대하고 위기적인 문제를 놓고 온 국민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학습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아마 처음으로 국가의 장래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자주의식으로 고민하면서 함께 성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지연, 학연, 혈연의 끈이 끊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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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비행기를 처음 타 본 것이 1975년 중동 건설현장에 일하러 갈 때이었고, 다음 해 미국에 간 것이 책에서만 읽던 선진국의 모습을 처음 본 기회이었습니다. 그 후로 많은 나라들을 다녀 보았는데, 결론을 말씀드리면, ‘잘 살아야 세계인들에게 대우받고, 뭉쳐있어야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중반까지 서양사람들은 일본인들을 ‘날생선을 먹는 야만인들’이라고 비하하였지만 지금은 유럽 상류층들이 젓가락으로 회를 먹고 있습니다. 지금 김치는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한국의 대표 식품이 되었지만, 1970년대 한국의 젊은 엄마들은 ‘가난한 조상들이 먹던’ 김치를 자녀들에게 안 먹이는 것을 잘 사는 기준으로 자랑한 적도 있었습니다.


초고속성장을 했던 지난 50년 동안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겼고 갈등이 심화되었지만 누가 뭐라 해도 지금 한국에 대하여 외국인들이 갖고 있는 인상은 ‘부러운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를 만드는데 50년이 걸렸지만 부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온 세계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가보고 싶고,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뭉쳐서 함께 잘 사는 풍요로운 나라’를 보전하기 위해 고칠 것은 과감히 뜯어고치고 서로 보듬어 주면서 뜻을 합쳐서 방향을 결정해야 할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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