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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영의 청경우독(晴耕雨讀)]1%의 독식·99%의 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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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단으로 치닫는 부의 쏠림
- "아무리 노력해도 상류층이 될 수 없다"
-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믿음 사라져

[아시아경제 임철영 기자]"차라리 전쟁이나 나서 새롭게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늦은 오후 마무리하지 못할 일을 끝내고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길.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큰맘 먹고 선택한 택시에서 "요즘 벌이가 어떠세요"라는 형식적 물음에 돌아온 택시기사의 답변이었다. 순간 카타스트로피즘(catastrophism)의 섬뜩함을 최대한 숨기고 이유를 물으니 "아무리 노력해도 생활이 나아지지 않아요. 그렇다고 씀씀이가 큰 것도 아닌데. 아낄 만큼 아끼면서 사는데도 사는 게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없어요. 전쟁이나 나서 모두 '0(제로)'에서 시작하면 지금보다는 좀 더 낫지 않겠어요?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삽니다." 택기기사의 이야기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택시기사의 극단적 답변의 배경에는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12%를 차지하고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5%를 가져가는 국가, 증시 시가총액의 4분의 1이 특정 대기업에 쏠려 있고 배당소득의 70% 이상이 상위 1%에게 돌아가는 국가, 새로운 정부가 출현해도 소득이 높은 사람들에게 유리한 정책이 만들어지고 서민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더 많은 중산층이 서민으로 내몰리며 희망보다 좌절을 이야기하는 2016년 대한민국이 있다.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하다고 여겼던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 이는 비단 대한민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부의 쏠림은 세계 주요국가에서 자본주의 국가라면 당연하게 여겼던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 축인 자유무역에 대한 회의로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신(新)보호무역주의에 대한 대중의 지지,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올림픽 보이콧(boycott) 등은 위기에 빠진 21세기 자본주의 시스템의 단면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종말을 고할 때가 온 것일까. 300년 전 자본주의에 대한 화두가 효율적인 이윤축적 등 시스템의 특성을 규명하고 발견하는 데 있었다면, 현재는 그 화두가 불평등 심화로 인한 시스템 붕괴 가능성으로 옮겨가는 양상이다. 2014년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21세기 자본론'으로 논쟁이 촉발된 것도 이 때문이다. 과거 500년 동안 전 세계 부의 집중 정도를 시계열로 분석한 결과가 지식인과 대중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소수 엘리트에 집중된 사회적권력 지적
중산층은 고용악화·급여하락 시달려
상향식 분배시스템 없애야


얼마 전부터는 주요국에서 나타나는 '경제 내셔널리즘'을 소수 독점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찾는 견해도 나오기 시작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거쳐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의 경제자문위원을 역임한 로버트 라이시가 대표적인 인물. 지난 8월 번역돼 출간된 저서 '자본주의를 구하라(saving capitalism)'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상위 1%의 독주를 막고 다수를 위한 자본주의를 구출하라'다. 1%의 독주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왜곡하고 있고, 시스템에 대한 대중의 신뢰 하락과 냉소로 이어지고 있으니 원래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는 의미다.

로버트 라이시는 이 책에서 전통적 의미의 정치적 엘리트는 물론 급부상한 기업과 금융 엘리트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시스템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다. 1% 엘리트에 집중된 힘은 소득과 부(富)가 위로만 쏠리는 소수 독점 자본주의를 공고하게 하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대중은 점차 소외되기 시작된다. 이른 바 자본주의를 구축하는 다섯 가지 구성요소 재산, 독점, 계약, 파산, 시행(집행) 등과 관련한 규율이 강력한 협상력을 가진 1% 소수 엘리트에 의해 만들어지다 보니 99%의 대중은 끼어들 자리가 없는 셈이다. 특히 중산층은 부작용으로 나타난 고용안정성 약화, 실질 급여 하락, 높아진 취업 문턱 등으로 몰락의 과정을 겪는다.

로버트 라이시는 1950년대 도로변에서 상점을 운영하며 공장 근로자의 아내들에게 여성복을 팔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양극화 심화에 문제를 제기한다. "아버지가 벌어오는 수입으로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가난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생활수준도 꾸준히 상승했다. (중략) 당시 대기업 최고경영자가 받는 급여는 평균적으로 일반 근로자의 20배 정도였지만 지금은 200배를 훌쩍 넘는다. 그동안 미국 1%의 소득비중은 9~10%에서 20%로 급증했다. 당시 미국 경제는 국민에게 희망을 안겼다. 자녀의 앞날에는 부모보다 여유 있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고 경제 게임의 규칙도 기본적으로 공정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이야기가 공허할 뿐이다."

로버트 라이시는 최고경영자(CEO)가 받은 급여에 숨겨진 메커니즘(mechanism)과 월스트리트 금융전문가들이 받는 보상에 가려진 속임수를 낱낱이 폭로한다. 미국의 대기업 CEO와 일반 근로자의 급여 비율은 1965년 20대 1에서 2013년 거의 300대 1에 육박했다. 1978년부터 CEO의 급여는 2013년까지 930% 이상 높아졌지만 일반 근로자는 10% 늘어나는 데 그쳤다. 월스트리트의 금융전문가들이 축적하는 부의 속도는 이보다 더 극적이다. 그러나 이 격차는 실력주의라는 미명하에 합리화되고 있다.

미국의 느린 경기회복 속도와 부실한 정책성과도 소수 독점 자본주의가 만든 극단적인 양극화에서 찾았다. 비교적 공정한 게임의 룰 안에서 경제성장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중산층이 양극화 과정에서 급격하게 붕괴되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는 지적이다. 대신 소수의 엘리트는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시스템의 민낯을 가리고 대중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는데, 그동안 시장이냐 정부냐를 둘러싼 논쟁을 부추겨 대중의 관심을 분산시켜왔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새롭게 대두된 경제 내셔널리즘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존재는 더 이상 공산주의도 파시즘도 아닌 현재 시스템에 대한 신뢰의 붕괴다." 저자는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의 위기를 이렇게 진단하면서 더 큰 문제는 대중이 대기업, 월스트리트, 억만장자들에 유리한 상향식 분배시스템 등에 저항할 힘이 전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로버트 라이시는 한국에 대해서도 소수가 독점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며 어떤 경제도 대규모 중산층이 구매력을 발휘해 성장속도를 받쳐주지 않고서는 유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시장이 아니라 '정치'"라는 한 저명 경제학자의 한마디가 겹쳤다.

희망은 있는 것일까. 저자는 부와 권력의 상향 분배를 끝내야 한다는 다소 선동적인 문구를 통해 다수를 위한 규칙을 새로 만들 대항 세력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엇보다 근로자의 노조 가입률이 하락하면서 중산층의 소득비중이 감소하는 상관관계를 보여주면서 미국의 중산층을 지탱해 왔던 노조의 소멸을 매우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래서 그는 대중의 냉소와 회의가 소수 독점 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결국 자본주의 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질 게 자명한 만큼 희망을 가진 대항 세력의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하위 90%는 빈곤의 늪으로 점점 빠져드는 데 반해 상위 10%가 온갖 경제적 이득을 끊임없이 거머쥐는 한 미국 경제를 유지할 방법은 없다. 또한 국민 대다수의 목소리를 계속 무시하면 미국 민주주의 역시 지탱할 수 없다."

로버트 라이시 지음/안기순 옮김/김영사/1만4800원

로버트 라이시 지음/안기순 옮김/김영사/1만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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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영 기자 cyl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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