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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악행극 /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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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줄의 글도 적지 못했습니다. 그것으로 미안함과 비겁함을 속죄 받을 것 같아서 혹시 나 스스로를 용서할 것만 같아서. 당신은 물었습니다. 가슴에 촛불을 켜고 저 이글거리는 광장에 나가지 않았느냐고.

 언제나 고개만 숙였습니다. 변명은 늘 부끄러우니까요. 아프면 그냥 아파야 합니다. 견딜 수 없어도 견뎌야 한다죠. 게으름을 좋아하는 저는, 참는 것이 제일 쉬운 저는, 겨우겨우 살아갑니다. 다만 구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꽃이라는 말, 약속이라는 말을 참 좋아했던 때가 떠오릅니다.
 당신에게 가는 길목엔 늘 햇살이 있었습니다. 씹지 못할 만큼 입속 가득 껌을 넣었습니다. 가난한 부요입니다. 높이 올라가라고 하고, 좀 독해지라고 합니다.

 제겐 침묵이 필요합니다. 제 자신을 용서할 것 같아 두렵습니다. 드라마를 보며 자꾸만 훌쩍이게 됩니다. 이제 곱은 손으로는 쓰지 않을 겁니다. 아픈 마음자리에 꽃망울이 머리를 내미네요. 노랗고 환하게 번지는 날입니다.

 
[오후 한詩]악행극 /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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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죽었습니다. 농사를 짓던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농사를 짓던 한 사람이 길거리에서 맞아 죽었습니다. 지난겨울 시위를 하다 물대포에 맞아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미 쓰러진 그분을 향해 물대포를 쏘고 쏘고 또 쏘던 그 잔인하고 참혹한 장면을 말입니다. 우리는 명백히 알고 있습니다. 누가 그분을 죽였는지, 누가 그분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하는지 말입니다. 이미 백 년도 더 전에 전봉준이 죽었듯 그렇게 농사를 짓던 한 사람이 다시 죽었습니다. 백 년이 지나도록 그 죽음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오늘 아침 먹은 그 밥과 반찬은, 그렇습니다, 저 끝나지 않은 죽음 위에 지어진 것입니다. 저는 저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안함과 비겁함"을 구걸해선 안 됩니다. "두렵습니다." 정말이지 한 줄의 글도 제대로 적지 못하겠습니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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