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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 칼럼]국민은 다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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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으로 내려갔던 A교수가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다. 그는 지난해 봄 정년퇴직하자 뒤돌아보지 않고 귀향했다. 그의 고향은 '서울에서 정확히 246㎞ 떨어졌다'는 호남의 외진 곳이다. A교수(엄밀히 말하면 전(前) 교수이지만, 모두가 A교수라고 부르니 그렇게 쓰기로 한다)는 퇴직 전에 구해 놓았던 빈집을 손보고, 작은 정원도 만들어 나무와 꽃을 심고, 닭도 키웠다. 1000여평의 텃밭에 상추, 고추, 고구마 등을 키우며 밭농사도 지었다.
 그로부터 60년 만의 귀향기와 귀농 분투기를 들으며 가장 가슴에 와 닿은 부분은 뜻밖에도 도시출신 초보농부의 어려움이나 혼자 사는 외로움이 아니었다. 함께 자리했던 친구 모두가 경탄한 것은 촌로들의 이야기, 그들의 지혜와 안목이었다.

 나이 70을 바라보는 A교수는 귀향한 마을에서 최연소 젊은이였다. 그는 촌로들을 만날 때 마다 열심히 인사했다. 하지만 반응은 무덤덤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귀촌귀농의 제1장이 '이웃과의 좋은 관계'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행동으로 실천하려니 주민들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몇 달이 지나서야 그는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깨달았다. 먼저 농촌 노인네들은 결코 무식하지 않았다. 외국에서 박사학위 받고, 대학에서 3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친 A교수 스스로 무학의 촌노들 앞에서 책상머리의 덧없음과 무지를 절감했을 만큼 세상을 보는 그들의 통찰과 몸으로 체득한 지력은 대단했다.
 정원만들기의 실패담은 하나의 사례다. 그는 교수출신답게 한국 전통 정원, 일본정원, 서양정원 등에 관한 전문서적을 100여권 통독했다. 연못을 만들까 말까를 놓고서도 일주일 넘게 고민했다. 나무와 꽃을 심고, 연못을 파고, 돌을 날라 작은 정원을 완성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생겼다. 방목해서 '자연친화적으로 키우기로 한 닭들'이 정원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닭도 날아다닌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배수가 되지 않아 연못 물은 썩기 시작했다. 몇 달간 한 마디 조언도 없었던 옆 집 노인이 처음 입을 떼었다. "꽃나무를 심어 놓고 닭을 놔 기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웅덩이는 왜 그렇게 만들었어."

 A교수는 귀향 후 주민들이 무반응으로 대하는 한두 달이 바로 면접기간이라고 했다. 이웃으로 지낼 만한 위인인지, 싹수는 있는지 두루 살펴 본 후에 나오는 결론은 간결하되 엄정하다. 누군가 "새로 온 교순가 뭔가 했다는 사람..." 하면서 입맛을 한번 쩝! 하고 다시면 앞으로 별 볼일 없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A교수는 시골 사람들이 무지하지 않을 뿐더러, 가난하지도 않다고 했다. 경로회관에 막걸리 몇 통, 삼겹살 몇 근 건네고 공치사해서는 안 된다. 함께 앉아 잔을 부딪치고, 삼겹살을 구우며 정을 나눌 때 비로소 진정한 이웃이 된다. 지난 1년간 체득한 A교수의 귀향귀농 리포트, 소통편의 핵심이었다.

 그가 말한 '촌로'에서 나는 '국민'의 모습을 떠올렸다. 침묵하지만 진실을 꿰뚫어 보는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 그들을 '국민'이란 이름으로 입에 쉽게 올리는 힘 있는 사람들. 최근 새누리당이 4.13 총선참패 반성문이라며 내놓은 '국민백서'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국민을 너무 우습게, 무식하게 본 거죠"(김모씨)
 현직 검사장이 구속되자 언제나처럼 법무장관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민중은 개돼지'라는 공직자도 있었다.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욕망을 '국민의 뜻'으로 포장한 '국민타령'은 힘차게 울려 퍼질 것이다. 그들의 언사가 아무리 교묘하더라도 진실인지 거짓인지 우롱인지 국민은 훤히 안다. 국민을 우습게, 무식하게 보면 안 된다.

박명훈 전 주필 pmhoon@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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