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30년, 코믹영화가 가장 힘들다는 '굿바이, 싱글'의 김혜수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고대 이집트인들은 영혼이 하늘에 가면 신이 두 가지 질문을 한다고 믿었다. "네 삶에서 기쁨을 발견했는가?" "네 삶이 누군가를 기쁘게 했는가?" 대답에 따라서 천국에 갈지 말지가 정해졌다고 한다. 배우 김혜수(46)는 자신이 있어 보인다. 연기를 즐기고, 작품으로 전하는 기쁨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띄엄띄엄 일할 때가 많다. "개인적으로나 일적으로나 원하는 걸 하고 싶은 순간,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것, 그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난 그렇게 살고 있다."
돈이 필요해서 막무가내로 덤벼든 시절도 있다. 김혜수는 올해 데뷔 30년을 맞았다. '깜보(1986년)'로 데뷔했다. 열여섯 소녀에게 촬영장은 낯선 세계였다. 무거운 장비를 들고 오고가는 아저씨들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연기의 어려움을 느낄 새는 없었다. 그저 아저씨들이 주는 대사를 외우고 시키는 대로 말했다. 유명세를 탄 뒤에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모든 일정이 그녀에게 맞춰 돌아갔다.
김혜수는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연기를 하느냐'다. '닥터봉(1995년)', '미스터 콘돔(1997년)', '찜(1998년)' 등 코미디 영화에 계속 출연하면서 거듭 어려움을 느꼈다. 촬영장에서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이미 재밌게 설정된 배역을 과장되게 묘사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남을 웃기는 재주가 없어요. 그런 감각이 부족하다보니 자꾸 뭔가를 하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요구받기도 했고요. 과잉된 생각이 덧씌워진 배역을 나중에 스크린에서 확인하고 절망했어요. 관객도 실망했고요. '열심히 해도 안 되는구나'라며 체념했죠. 코미디 연기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힘든 것 같아요."
"촬영 전 스태프와 여러 차례 회의했어요. 어찌 보면 뻔한 얘기잖아요. 무조건 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배역의 성격을 다듬는데 공을 들였어요. 말초적인 내용으로 웃음을 유발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고맙게도 김태곤 감독이 촬영장에서 '더 톤을 올려주세요' 등의 주문을 하지 않았어요. 코미디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찍을 수 있었어요."
김혜수는 올해 초 방송된 드라마 '시그널(tvN)'로 지난 3일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제는 배우로서 쉽지 않은, 나이 들어가는 모습도 연기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갖췄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원숙한 중견배우로 바라보는 시선을 좋아하지 않는다. 숨길 수 없는 주름 때문이 아니다. 배우의 삶에 '완성'이란 없고, 죽을 때까지 과정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촬영이 다가오면 힘들어요. '내가 미쳤지. 왜 한다고 했지?'라며 한탄하죠. 굿바이 싱글도 다르지 않았어요. '제일 못하는 연기가 코미디인데 어쩌려고 맡았니?'라고 많이 자책했어요. 밥도 안 넘어가고, 세상에 온갖 고민을 다 떠안은 사람처럼 풀이 죽어 있었죠. 그때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요. 연기가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죠. 어느 부분에서는 도움을 받을 용기도 생겼어요."
그녀는 대중에 기대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많은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자신이 빌미를 제공했고, 그 생각 역시 존중돼야 한다고 여긴다. 더구나 자신을 성숙하게 만든 원동력으로 생각한다. 그들 덕분에 꾸준한 노력과 의지가 몸에 뱄다.
"30대에 근접할 무렵 내가 배우이고 다양한 인간군상을 표현하면서 대중과 공감하고, 함께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느낌들이 조금씩 쌓여 나 자신을 성숙시키고, 행복으로 다가오는 것 아닐까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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