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혁명가는 말했다, "네 권리는 네가 저항한 만큼만 찾는 것"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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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혁명은 다 익어 저절로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떨어뜨려야 하는 것이다.”


아이작 뉴턴은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유추했으나, 체 게바라는 혁명이라는 사과를 떨어뜨릴 것을 주문했다. 인간이 땅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중력’을 발견한 것만큼이나, ‘혁명’을 쟁취하라 요한 그의 권고는 곧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힘의 발견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혁명에 투신했고, 여전히 투쟁의 아이콘으로 제3세계를 비롯한 민중의 곁에 현현하고 있다.


혁명의 빛과 동반자


체는 쿠바가 아닌 아르헨티나의 중산층 백인 가정 출신으로, 본명인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에서 드러나듯 귀족 혈통의 부르주아 병원장의 장남으로 태어나(1928년 오늘 6월14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를 졸업한 체는 의사로서의 보장된 미래를 박차고 과테말라로 이주, 페루에서 망명 온 여성 혁명가 일다 가데아를 만나 가정을 이룬다. 민중의 힘으로 이룬 진보정권이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군부에 붕괴되는 것을 지켜본 체는 이를 계기로 혁명에 투신하나 이내 과테말라 혁명이 실패,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이내 멕시코로 망명하게 되고, 이때 아내의 소개로 혁명동지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혁명의 치열한 전장은 둘을 동지로 만들었으나, 전투가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동지는 서로의 견해를 좁히지 못하고 갈라선다. 사진 =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혁명의 치열한 전장은 둘을 동지로 만들었으나, 전투가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동지는 서로의 견해를 좁히지 못하고 갈라선다. 사진 =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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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바티스타의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멕시코로 망명 온 피델 카스트로와 의기투합한 체 게바라는 쿠바 해방 운동에 군의관으로 합류, 치열한 훈련을 거듭한 끝에 혁명군의 일원으로 거듭난다. 멕시코에서 결성된 82명의 혁명군은 1956년 12월, 쿠바에 상륙 후 정부군의 공격으로 최후에는 17명만이 생존하게 되나, 독재에 억눌려 왔던 시민의 전폭적 지지로 1959년 1월 수도 하바나를 접수하며 혁명에 깃발을 쿠바에 꽂을 수 있었다.



정치의 그림자와 추락

혁명의 성공 끝엔 새로운 정국 구상이 한창이었다. 현장을 누비며 대중의 지지를 얻던 그가 국립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 등의 정부 요직을 맡자 서방세계에서는 체를 두고 ‘쿠바의 두뇌’라고 평가했지만, 성과는 보잘것없었다. 의학을 전공한 혁명가에게 경제는 낯선 분야였고, 혁명군 활동이 몸에 익어 탁상공론보다 현장의 대민지원에 강했던 그의 행보는 자연히 농장과 공장과 같은 노동자와 함께 호흡하는 장소로 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농업 중심국가인 쿠바의 공업국 전환을 위한 다수의 정책은 산업 국유화 과정의 폐단과 미국의 경제 봉쇄정책에 가로막혀 나쁜 성적표를 기록하게 된다.



체 게바라는 쿠바의 일반 대사로 서방세계를 누비며 반제국주의 외교활동에도 힘썼다. 사진 = 평양을 찾은 체 게바라

체 게바라는 쿠바의 일반 대사로 서방세계를 누비며 반제국주의 외교활동에도 힘썼다. 사진 = 평양을 찾은 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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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직후 반대파 숙청을 위한 정치범 수용소의 소장직을 맡았던 것 또한 그의 혁명 이력 중 오점으로 남는다. 독재자에 맞서 항거하던 혁명가(카스트로)가 스스로의 또 다른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정적을 투옥하고 처형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진두지휘했던 체 게바라는 역설적으로 소련의 도움으로 보다 손쉬운 정권유지를 계획했던 카스트로의 손에 정치적으로 배제당했다. 혁명의 끝에서, 또 다른 혁명보다 안정이 간절했던 쿠바는 더 이상 체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는 가족과 카스트로에게 ‘쿠바에서 할 일은 다 끝났다’는 편지를 남기고 돌연 사라졌다.



혁명가가 꿈꾸던 이상과 현실

아프리카 콩고로 향한 체는 그곳에서 새로운 혁명을 꿈꿨으나, 노선 차이로 갈등을 빚고 이내 남미혁명의 또 다른 현장 볼리비아로 돌아온다. 그러나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쿠바의 민중과 달리 볼리비아 원주민들은 백인인 체를 적대시했고, 볼리비아 공산당 역시 호전적인 그의 성향과 소련의 견제를 부담스러워했다. 미국의 추격까지 더해진 상황에 빈손으로 정글에서 외로운 투쟁에 몰두한 체는 볼리비아에 들어온 지 1년만인 1967년 10월, 정부군의 매복에 걸려 총상을 입은 채 생포된 지 하루 만에 처형당한다.



체 게바라는 생포된지 하루 만에 처형당했다. 그의 사체는 1997년에야 발굴 되어 쿠바로 이송, 국장을 통해 안장되었다. 사진 = Freddy Alborta Trigo

체 게바라는 생포된지 하루 만에 처형당했다. 그의 사체는 1997년에야 발굴 되어 쿠바로 이송, 국장을 통해 안장되었다. 사진 = Freddy Alborta Tr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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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포 당시 빈사 상태에 가까웠던 그는 자신의 처형을 주저하는 집행자를 향해 “떨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라!”고 말했다 전해진다.


그의 죽음은 68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고, 사진작가 알베르토 코르다가 남긴 한 장의 사진은 오늘날까지 혁명을 희구하는 모든 이에게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소비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남아있다. 그의 본래 이름보다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이름 ‘체’는 이탈리아어 ‘c'e’에서 온 말로 스페인어로는 ‘이봐’, 아르헨티나의 과라니어로는 ‘나로서는’의 뜻을 갖고 있다. 쉽게 불리길 원했던 사내, 자신의 이상을 현실로 옮기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던 혁명가. 혁명에는 성공했지만, 정치는 실패하고 끝내 다른 혁명을 위해 뛰어들었다 끝내 죽음을 맞은 한 남자의 일생에서, 멈추지 않고 그를 전진케 했던 집념은 무엇이었는지를 되짚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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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가 태어난 날, '생의 혁명'을 묻는다 원본보기 아이콘


“네 자유와 권리는, 딱 네가 저항한 만큼 찾는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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