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이러쿵저러쿵'
좋은 아빠 되기는 '소통할줄 아는 권력자'가 되는 수업이었다. 가정 내에서 일정한 권력자이며 기득권자이며 완력과 돈과 지식을 지닌 존재인 아빠가, 그렇지 못한 존재이며 '자기의 소유'에 가까워 보이는 자식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의 문제.
자식들은 그저 맨몸과 맨정신으로 소통에 나서면 되지만 아빠는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부성(父性)의 깊은 바탕인 사랑과 인간관계의 바탕인 평등으로 자식들을 대하는 '특별한 훈련'을 받아야만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 세상의 부모들이 자주 놓치는 것은 이것이다.
많은 부모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척 하는 일에 익숙하지만, 갈등 국면에서는 금세 권력자와 완력자로 변한다.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고 죽이고 주검을 방치까지 하는 세태는, 그저 특수한 가정에서 벌어진 특별한 비극이 아니라, 저 '수업'의 취지를 놓친 부모가 만들어낸 악마적 풍경이다.
처음엔 가난하고 힘없는 자식들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말했지만, 곧 그런 슬로건이 공동체를 경영하는데 아주 불편한 것임을 깨닫고 슬그머니 포기하고 약속들을 식언하는 일.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자식을 배신자라며 버럭 화를 내고 쫓아내는 일. 집안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하늘 탓이며 내 책임이 아니라고 믿는 일. 성가신 일은 가급적 피하고 문제가 생기면 완력으로 진압하는 일. 질병이 창궐하면 우왕좌왕하다가 병을 퇴치하려 총대를 멘 쪽에게 책임을 묻는 일. 스스로의 뜻을 막아선 상대를 욕하며 거리에 나가 그들을 심판해달라고 호소하는 일. 어렵사리 만들어놓은 공동체의 보물을 한 순간에 냅다 던져버리며 분노와 위험의 스케일을 키우는 일. 그 보물을 지키고 키워오던 이들을 순식간에 도탄에 빠지게 하는 일. 이런 일들은 '무서운 아빠' '말이 안통하는 아빠' '완력을 쓰는 끔찍한 아빠'에게서 나옴직한 일들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아마도 그가 자식을 '동등한 소통 주체'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쉽게 말하면, 그가 민주주의를 슬며시 놔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처음에 목소리를 높였던 '따뜻한 아빠'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비판자를 쳐내고 경쟁자를 욕하며 위험한 적과 무한대치하면서 리스크를 높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그런 '무서운 아빠'의 얼굴이 보인다. 자식들 쯤이야 선거로 한번 확 쓸고나면 잠잠해지는 존재 정도로 생각하는 아빠라면 더 무섭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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