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_progress

아시아경제 최신 기획이슈

[라이벌⑤]터프한 브라더 보가트, 섹시한 금발폭스 먼로

최종수정 2016.08.12 09:50 기사입력 2016.01.04 14:00

댓글쓰기

보가트 '전쟁 후의 상흔'·먼로 '철모 속에 핀 꽃'으로 불리며 1930~50년대 영화팬 사로잡아

험프리 보가트

험프리 보가트


[아시아경제 정동훈 수습기자]스타는 맥락 속에서 태어난다. 배우가 연기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스타는 대중이 공유하는 맥락, 인기에 의존한다. 대중과 교감하면서 그들의 결핍을 채우고 심장을 뛰게 한다. 워너브러더스사(워너)와 20세기 폭스(폭스)도 스타가 있었기에 메이저의 반열에 올랐다. 험프리 보가트와 메릴린 먼로. 워너와 폭스의 현재를 있게 한 주인공들이다. 저음의 터프가이와 섹스 심벌의 등장은 할리우드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보가트는 늦깎이 스타였다. 마흔이 돼서야 배우로서 이름을 알렸다. 브로드웨이의 밤에 사로잡혀 1921년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1930년대 영화에는 폭력배나 터프가이 중 하나로 등장했다. 당시 보가트는 "제임스 캐그니 같은 스타들이 거절한 캐릭터만 맡긴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그는 '하이 시에라(1941)'를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금고털이에 실패한 주인공 로이 얼 역을 맡아 우울하고 내성적이며 고립된 인간을 그렸다. 그리고 보가트는 '카사블랑카(1942)'를 만난다. 냉소적이지만 사랑과 양심을 잃지 않은 남성을 연기했다. 그의 연기는 당시 남성들 사이에 폭넓은 공감대를 만들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은 남성들은 불안과 고독 속에서 살았다. 강해야 했기에 감춰 두었던 감성, 그곳이 보가트가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지점이었다. 보가트는 '아프리카의 여왕(1951)'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보가트가 전쟁 후의 상흔이었다면 먼로는 철모 속에 핀 꽃이었다. 타오르는 듯한 금발과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특유의 걸음걸이, 천진난만한 미소는 세계 영화팬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7년만의 외출(1955)'은 사람들의 가슴에 오래 남았다. 지하철 환풍구 위에서 스커트 자락을 펄럭이며 허벅지를 드러낸 모습, 풍만한 가슴과 도발적인 입술, 반쯤 감은 눈. 이 한 장면에 먼로가 우리의 마음을 빼앗고 만 모든 이유가 담겼다.

메릴린 먼로

메릴린 먼로


먼로는 1944년 군부대 사진작가의 눈에 띄어 모델로 연예활동을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방위산업체에서 분무기로 페인트 뿌리는 일을 했다. 1946년 20세기폭스사와 배우로서 첫 계약을 했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1953)',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1953)' 등에 출연하면서 폭스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섹스 심벌'로 이미지를 굳혔다. 폭스는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는 '먼로 워크'를 영화계 최고의 히트 상품으로 끌어올렸다.

먼로는 1954년 1월 4일 메이저리그의 전설 조 디마지오와 결혼했다. 메이저리그와 할리우드, 미국 사회에서 가장 대중적인 두 세계의 만남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9개월 만에 끝이 났다. 먼로가 항상 대중의 관심을 원했던 반면 디마지오는 대중의 관심을 싫어했다. 이혼한 먼로는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 정치계에서는 존 F. 케네디ㆍ로버트 케네디 형제와 염문을 뿌렸다. 미국은 먼로를 사랑했지만 먼로는 행복하지 않았다. 먼로가 극작가 아서 밀러와의 세 번째 결혼도 실패하고 약물중독에 빠지자 디마지오가 손을 내밀었다. 재결합을 앞둔 1962년 8월 5일, 먼로는 숨을 거둔다. 디마지오는 매주 먼로의 무덤에 장미꽃을 바쳤다. 1999년 죽음을 앞두고 그는 중얼거렸다. "먼로를 다시 볼 수 있겠군".
보가트와 먼로가 활약한 할리우드의 1930~1950년대는 눈부셨다. 영화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눈ㆍ비에도 끄떡없는 거대 스튜디오는 공장에서 상품을 생산하듯 영화를 찍어냈다. 영화사들은 포드(Fordㆍ미국의 자동차회사)처럼 표준화ㆍ분업화를 이뤘다. 시나리오 작가, 감독, 배우 등과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기획, 시나리오, 연출, 촬영 등 각 부문의 분업화와 표준화를 통해 효율적 제작 시스템을 구축했다. 알기 쉬운 스토리, 대중에게 호소력 있는 스타, 흥행이 검증된 장르 등이 흥행하는 영화의 3대 요소로 자리 잡는다. 특히 보가트, 먼로와 같은 스타는 천편일률적으로 흐를 수 있는 장르영화에 색과 향을 더했다.

영화 '7년만의 외출' 포스터

영화 '7년만의 외출' 포스터


당시 워너가 전속 계약한 배우들은 갱스터 영화의 대부 제임스 캐그니(더럽혀진 얼굴의 천사ㆍ1939)를 비롯해 베티 데이비스(이브의 모든 것ㆍ1950),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바람과 함께 사리지다ㆍ1939), 폴 뉴먼(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ㆍ1958), 험프리 보가트(카사블랑카ㆍ1949), 조안 크로포드(서든 피어ㆍ1952)가 있었다. 감독은 마이클 커티스(로빈후드의 모험ㆍ1939), 라울 월시(하이 시에라ㆍ1941), 존 휴스턴(시에라 마드레의 황금ㆍ1948)등이다. 폭스에 전속한 배우는 윌 로저스(굽이도는 증기선ㆍ1935), 셜리 템플(소공녀ㆍ1939), 소냐 헤니(은령의 세레나데ㆍ1941), 돈 아메체(알렉산더 그레엄 벨 이야기ㆍ1939), 알리스 페이(시카고ㆍ1939), 타이론 파워(면도날ㆍ1946)다. 감독은 존 포드(1935ㆍ밀고자)가 대표적이다. 영화사가 투자ㆍ배급을 총괄하는 수직적 구조는 1949년 '패러마운트 판결'을 기점으로 해체됐다. 미 연방법원은 제작사, 투자 배급사, 극장 체인의 분리를 명령했다. 1950년대 이후 메이저 영화사의 전속배우들도 점차 사라졌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85)는 예외였다. '독수리 요새(1968)'에 출연한 이후 47년간 감독과 배우로서 워너와 함께했다. 워너가 제작한 영화 서른일곱 편에서 감독을 맡거나 배우로 출연했다. 이스트우드는 만능 연기자였다. '석양의 무법자(1966)'로 서부극 전성기를 이끌었고 '용서받지 못한 자(1992)'로 서부극의 완성판을 보여줬다. 알프스로 날아가 '아이거 빙벽(1975)'을 찍더니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에서는 불륜남의 애틋한 사랑을 연기했다. 특히 감독으로서 재능을 발휘했다. 주연과 감독을 동시에 맡은 '용서받지 못한 자'로 아카데미 작품상ㆍ감독상을 받았다. 감독을 맡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앱솔루트 파워(1997)',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 '인빅터스(2009)'는 흥행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정동훈 수습기자 hooney531@

정동훈 수습기자 hooney531@asiae.co.kr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간격처리를 위한 cl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