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병신년 콤플렉스를 아는가. 연말마다 그 다음에 펼쳐질 한 해를 상서롭게 여기며 그 새로운 시간을 예찬하고 싶은 마음이 된다. 올해도 그 마음이야 다를 리 없지만, 해를 가리키는 천간(天干)과 지지(地支)가 살짝 얄궂게 붙었다.
천간은 '하늘의 줄기'를 나눈 것으로, 甲(갑) 乙(을) 丙(병) 丁(정) 戊(무) 己(기) 庚(경) 辛(신) 壬(임) 癸(계) 등 10개로 나뉘어져 있고, 지지는 '땅의 가지'를 말하는 것으로 子(자) 丑(축) 寅(인) 卯(묘) 辰(진) 巳(사) 午(오) 未(미) 申(신) 酉(유) 戌(술) 亥(해) 등 12개로 되어있다. 이것이 서로 '경우의 수'로 조합하면서 60개의 간지(干支)가 만들어진다. 하늘과 땅이 서로 얽혀 짜이는 것이니, 우리가 맞이하고 보내는 시간들이 오묘한 우주의 행렬에 속해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동양적 사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병신년은 미국이 치열한 투쟁 끝에 독립을 성취한 해(1776)이고 그해는 또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발표하여 자본주의의 한 기틀을 세운 해이다. 고려가 후삼국 통일을 이룬 것(936)도 병신년이었고, 세계를 놀라게 한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지는 것(1236)도 그 해이다. 조선 르네상스를 꽃피운 정조가 즉위한 것(1776)도 병신의 일이며 고종이 일본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전략으로 러시아공사관으로 몰래 '정치 무대'를 옮긴 아관파천(1896)도 그 해에 일어났다. 그러니 역사 속의 병신년은 중요한 성취들이 이뤄지고 획을 그은 인물들이 등장하던 해이기도 했다. 허투루 볼 해가 아니란 얘기다.
오늘자 모 인터넷언론 홈페이지 검색란에 오른 톱기사는 "<박근혜 병신년 지지율> 우린 이러지 말자"이다. 기사 내용을 읽어보면 장애인이나 특정인에 대한 폄하가 될 수 있는 표현으로, 내년 간지를 이용해'먹는' 일을 자제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참으로 가상한 취지인데, 실상은 그 제목부터 이미 이 나라의 리더에 대한 교묘한 조롱의 뉘앙스를 담아, 앞으로는 두들기는 척 하며 뒤로는 슬쩍 그것을 즐기는 언론의 행태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내년의 간지를 핑계로 공공연한 욕설을 내밀며 뒤에서 킥킥거리는 후련함을 즐기려는 태도가 선연히 읽힌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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