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백재현 뉴미디어본부장]
1833년 오늘은 구한말 꼬장꼬장한 선비의 대명사 격인 면암(勉菴) 최익현 선생이 태어난 날입니다.
경기도 포천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13세에 성리학의 거두인 이항노에게서 수학합니다. 자연히 면암은 위정척사론에 깊이 빠져들게 되죠. 23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에 나서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본성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대원군의 정책에 대해 쓴 소리를 쏟아 내죠. 결국 선생은 제주도로 2년간 유배를 가게 됩니다.
제주도에서 풀려난 뒤 1876년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도끼를 메고 경복궁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립니다. 이로 인해 그는 다시 흑산도로 유배됩니다. 당시 상소 내용 중에는 ‘우리의 농산품을 일본의 공산품과 교역하면 경제가 파탄 날 것’이라며 ‘비교우위론’적 시각으로 파악하고 있는 내용이 엿보입니다. 제국주의적 경제 침탈을 예견했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선생은 또 ‘강화가 성립되면 금수와 같은 양인(洋人)의 사교(邪敎)가 들어와 우리의 전통적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라며 개항을 반대했습니다. 위정척사(衛正斥邪思想)>/b> 사상이니 당연한 논리였을테구요. 이 때문에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수구꼴통’으로 낙인 찍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위정척사에서 정(正)과 사(邪)는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으니까요.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선생이 ‘가단두 불가단발(可斷頭 不可斷髮)’이라며 반대 한 것도 전통의 가치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한 그의 내면을 보게 합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74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모집해 분연히 일어난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선생은 결국 일본에 의해 대마도로 유배 되었고 그곳에서 74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습니다.
비록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시대착오’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선비의 기개만은 높이 사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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