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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습격] 침묵의 온도(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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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입으로 할 수 있는 행위 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언어들을 입 속에 가두고 깊이 자기 내부로 들어가 앉는 그 행위에는 삼엄한 기운이 감돈다. 세상으로 열린 언어의 문을 닫고 마침내 자기 안의 폐인(閉人)이 되어, 내성적인 우주에 눈뜨는 길이다. 그런 침묵은 산정(山頂)의 벼랑에 앉은 문닫힌 암자처럼 구도의 포즈를 취한다.

하지만 많은 침묵들은 일종의 언어이다. 말하지 않는 것은, 가장 풍부한 언어일지도 모른다. 침묵이라는 그릇에는 슬픔과 사랑과 부끄러움과 수줍음과 믿음과 희망과 미움과 증오와 경멸과 놀라움과 측은함과 혼란스러움과 괴로움이 저마다 담긴다. 생각해보면 어느 하나, 같은 침묵은 없을지 모른다. 침묵은 대화의 일부이기에 대화 속에 존재한다. 침묵과 침묵이 서로 대화하기도 하고 침묵과 대화가 서로 한 삽씩 얹히는 소통이 있기도 하다. 결정적인 침묵이 있고, 모든 침묵 끝에 결정적으로 터져나오는 언어가 있기도 하다.
그런데 모든 침묵에는 그 온도가 있다. 침묵의 온도는 각기 다르다. 얼음보다 차가운 침묵이 있고 37.5도로 피가 흐르는 침묵이 있고 뜨거워서 절절 끓는 침묵도 있다. 침묵은 사람에 따라 그 온도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침묵이 몇 도씨인지에 대한 힌트는 대개 표정에 숨어있기도 하다. 밝은 침묵은 따뜻하다. 어두운 침묵은 차갑고 깊다. 밝은 침묵에서는 곧 언어가 나올 듯 하지만, 어두운 침묵은 아무리 두레박을 내려 언어를 길어올리려 해도 바닥에 닿지 않을 것 같다.

감정이 입술을 닫게 하는 젊은 날의 침묵은 갑갑하면서도 좋았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혀가 움직이지 않는 희한한 현상. 우린 거기에서 가장 달콤하고 침묵을 맛보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침묵들은, 혀가 굳은 게 아니라 마음이 굳어서 생겨나는 것이다. 언어들이 치약용기의 주둥이가 마른 것처럼 바싹 말라 나오지 않는다. 혹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기에, 침묵하는 경우도 있다. 침묵은 부끄러움을 표현하고 괴로움을 드러내는 표지이기도 하다. 슬픔을 관리하고 울음을 제어하는 관문이기도 하다.

세상의 침묵들 중에서, 따뜻한 침묵에 둘러싸여 사는 삶은 괜찮은 인생이다. 말이 없어도 다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어, 그저 가만히 같이 앉아있기만 해도 위안이 되는 그런 자리에 앉은 사람은 침묵을 잘 매만져온 사람이다. 침묵보다 나은 말 몇 마디만으로 소통의 등(燈)을 켠다면 간담상조할만한 충분한 빛이 나온다. 세상의 전쟁과 갈등들은, 언어 속에 낌새가 있는 게 아니라, 먼저 침묵의 온도가 급속히 내려가는 것에 징후를 찾는 게 옳을지 모른다. 침묵이 서먹해지고, 침묵이 야릇해지고, 침묵 속에 냉기가 흐를 때, 인간관계는 그 지점에서 파탄의 길을 걷는다. 침묵의 온도를 관리하는 일은, 보이지 않는 것, 마음의 문제를 배려하고 헤아리는 것이다. 입을 다무는 인간은 말을 멈춘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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