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은 시간의 첫 눈금을 긋는 일이다. 물론 내가 지금 임의로 시간의 첫 눈금을 그었다고 그것이 기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눈금을 긋는 자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권력을 지닌 자이며, 시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닌 자일 것이다. 그가 그어놓음으로 시작된 시간 개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동의하고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기원이라 할 수 없다. 최고의 시간 권력이 바로 '기원'을 만들어낸 자일 것이다.
기원을 만들지 않았다면, 혹은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기원을 고집하여 서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졌다면, 우리는 가까운 과거마저 제대로 음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간에 눈금이 그어지지 않았다면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가 시간 속에 개념적으로 들어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과거의 시간은 모호해지고 수많은 착오와 혼란 속에서 역사의 양상들의 대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무인도에 떨어져서 자신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살았다면 그는 언제 무엇을 했는지 기억할 수 없다. 시간에 따라 일어난 사건들을 배열할 수도 없고 사건들의 연관성을 만들어내거나 선후를 대조하여 의미를 찾는 일도 할 수 없다. 이 모호한 과거들이 구분없이 소용돌이치는 상태, 이런 것이 인류에게도 상당히 오랫 동안 그리고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원 속에 들어있지 않은, 그래서 시간의 눈금으로 표현할 수 없는, 중요한 역사들이 인류사의 멀지 않은 저쪽에 무수히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기입되지 않았을 뿐인 그 역사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어떤 신념과 가치와 믿음과 교훈 따위도 거기 함께 묻혀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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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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