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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대신 노량대첩 이끈 '이순신'을 아십니까?

최종수정 2014.08.31 15:44 기사입력 2014.08.3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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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역사 기록물 속 '명량대첩'과 영화 '명량' 비교글 펴내 화제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명량'

'명량'

최근 한국영화 역대 최대 관람객 기록을 깬 영화 '명량'(鳴梁)은 뜨거운 반응 만큼이나 논란도 많았다. 특히 이순신 장군의 그 유명한 '12척 장계'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비롯해 일본 해군의 배가 133척이냐 330여척이냐 등 평상시라면 관심도 없었을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관심이 고조됐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 기록과 영화 '명량'에서 묘사된 것들은 얼마나 어떻게 차이가 있을까?

이와 관련 현재 우리나라의 국가 기록의 보관, 정리, 활용 등을 공식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국가기록원이 최근 영화 '명량'과 관련된 각종 기록을 통해 역사적 사실과 영화에 묘사된 것들을 비교한 글을 펴내 관심을 끌고 있다.

국가기록원은 공식 소식지인 'e기록속으로' 8월호(35호)에 실린 '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 영화에선 볼 수 없는 명량(鳴梁)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통해 실제 존재했던 각종 기록물 속에 등장하는 사실들과 감독이 새로운 메시지와 감동을 주기 위해 역사를 재해석하고 상상해 묘사한 부분을 비교ㆍ분석했다.

우선 개봉 직후부터 네티즌 사이에 논쟁이 뜨거웠던 '12척 대 333척' 여부에 대해선 해당 기록물들을 검토한 결과 "13척이 맞지만 극적임을 강조하기 위해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글에 따르면,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는 이순신 장군의 명대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충무공의 조카 이분이 쓴 '이충무공행록'과 서애 유성룡이 쓴 '징비록'을 통해 전해지는 내용으로, 1597년 8월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 담겨져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선 이 장계를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같은해 11월10일 충무공의 전과를 보고하는 대목에서 12척이 아닌 13척의 배로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재상이었던 이항복의 '충민사기'에도 13척으로 기록돼 있다.

이에 대해 국가기록원은 "시점 상의 차이로 생긴 것"이라고 분석했다. 명량해전 이전 기록과 후자의 기록이 달라지는데, 명량대첩 일주일전인 9월9일 송여종이 전선 1척을 이끌고 합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3척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왜적의 배 숫자가 130여척이냐 333척이냐에 대해선 충무공이 전장에서 헤아린 것과 나중에 각종 기록을 종합해 계산한 것과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봤다. 난중일기와 이순신 장군의 장계가 담긴 선조실록에서는 130여척으로 봤지만, 유득공의 '이충무전서'(1795년)는 333척, 난중일기를 정리한 이충무공전서(1795년)은 330여척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실제 전투에 참여한 왜적의 배는 130여척의 배가 맞지만, 후방 포구에 왜적의 배 200여척이 대기 중이었다는 기록이 여러 문헌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극중 가장 비겁한 인물로 묘사된 경상우수사 배설의 실제 기록도 많이 다르다. 배설은 영화 속에서 거북선을 태우고 이순신 장군을 암살하려다 도주하던 중 화살에 맞아 죽었지만, 실제 기록은 그렇지 않다. 우선 거북선을 불태웠다는 것부터 사실이 아니다. 거북선은 칠천량해전에서 이미 침몰해 당시 이순신 장군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7월22일자 난중일기에선 "배설이 합류했다"고 전했으며, 27일자에 "배설이 찾아 왔는데 몹시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어찌하여 배 수사는 피하려고만 하시오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후 난중일기에선 더 이상 배설에 대한 기록이 없고, 다른 문헌을 통해 배설이 병을 핑계로 도주한 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공식적으로 배설은 전의를 상실한 채 도주했다가 전쟁이 끝난 후 추포에 나선 권율에게 잡혀 참형을 당했다. 영화는 최고의 비겁자로 그를 묘사했지만, 칠천량해전에서 유일하게 적선 8척을 침몰하는 전과를 올리는 등 '나름' 용맹을 떨친 장수였고, 국가의 무능, 부패 등에 실망한 나머지 '비겁자'로 돌아선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영화 '명량' / CJ E&M

영화 '명량' / CJ E&M

또 다른 영화와 기록의 차이점은 사망ㆍ부상자 등 아군의 피해다. 난중일기에선 사망 2명, 부상 3명일 뿐이라고 나와 있는데, 영화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친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이날 이순신 장군이 올린 전과는 11월 10일에야 선조에게 보고돼 있는데, 왜적의 피해상황에 대해서만 보고하고 아군의 피해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난중일기에 대장선에서 2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부상했으며, 안위의 전함에서 격군 7~8명이 바다에 떨어졌다는 간략한 서술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영화에 나오는 조선 수군의 주력 함정 '판옥선'이 실제로는 물에 젖은 솜이불을 함상 위에 마치 빨래처럼 늘어져 있는 등 '볼품없는' 모습이었을 것이라는 기록도 있다.

이 글에 따르면, 지난 2011년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 소장이 발굴해 최초 공개한 고창 출신의 유생 오익창(1557~1653년)의 '사호집'에는 명량해전 당시 인근 지역 사대부들에게 솜이불 100여채를 얻어 물에 적신 뒤 배에 걸었더니 조총 탄환이 이를 뚫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익창은 당시 41세로 군량과 무기 공급 등 명참을 맡아 전투 승리에 큰 기여를 해 공조 정랑까지 오른 인물이다. 만약 배 위에 물에 적신 솜이불이 여기저기 걸쳐 있는 판옥선이 영화에 등장했다면 어땠을까.

이밖에 이 글은 명량대첩 등 이순신 장군이 치룬 각종 전투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지만 등장하지 않은 '동명이인' 이순신 장군의 존재도 기록을 통해 살펴본다. 동명이인 이순신(1554~1611년)은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무과에 급제한 후 1592년 방답진첨절제사로 있던 중 충무공을 만나 전투 편대의 중앙을 책임지는 '중위장'으로 당황포ㆍ한산도ㆍ부산포 해전 등에서 큰 공로를 세웠다.

특히 노량대첩에서는 충무공이 전사한 후 그를 대신해 함대를 지휘하면서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지은 명장이다. 명량대첩에는 아쉽게 참전하지 못했다. 선조가 수도권방위를 이유로 전출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무공은 1597년 4월1일자 난중일기에서 "옥에서 풀려나 남대문 밖 윤간의 종 집에 임시 거처할 때 이순신이 술병을 들고 찾아와 밤늦게까지 마시며 간담했다"고 적었다. 이순신 장군과 그의 '동명이인' 이순신은 각별한 친분을 유지한 동료이자 부하였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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