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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시대, 남자가 사는법(23)]간호사가 날더러 "아버님"하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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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네 '아비'냐 듣는 중년기분은 아비규환

[아시아경제 최창환 대기자] 이게 다 원빈 탓이다.

무슨 소리냐고? 들어보면 안다.
 "아버님 이쪽으로 오세요." 워매 '아버님'이라네. 2년 전쯤 아버님 소리를 낮선 여인에게 처음 들었을 때 망치로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뒷통수가 띵하고 다리가 스르르 풀리면서 하늘이 노랗게 됐다. 마치 나도 몰랐던 나의 아이가 나타나서 "아버님" 하고 부를 때의 충격과 같을 듯하다.
 그 소리를 2년만에 또 들었다. 회사에서 지원하는 종합검진을 받았다. 예쁜 간호사가 "아버님 이쪽으로 오세요"라며 친절하게 안내한다. 속으로 '내가 왜 당신 애비냐' 하면서 쫓아간다. 2년 전보다는 덜하지만 충격은 여전하다.

 2년 전에 허리가 아파 동네 정형외과에 갔다. 동네 할머니, 할어버지들이 아침 일찍부터 기다리고 계신다. 문을 열기 전에 이미 대기하고 있다. 접수를 하는데 40대 아줌마 간호사가 "아버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한다. 잠깐은 무척 길었다. '가는 세월 그 누가 막을 수가 있나요'라는 서유석의 어록이 떠오른다. 옆에 있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이제 나도 늙었나'라고 자문해 보기도 한다. 목이 아파 갔다가 마음이 다쳐 돌아왔다.

 전에도 아버님이란 호칭을 들은 적이 있다. 아이들 학부형 자격으로 학교에 갔을 때 선생님들이 "00이 아버님" 하고 불렀다. 그때는 더 젊었지만 흥분하지 않았다. 선생님들도 다 여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의 아버님과 간호사의 아버님의 차이는 뭘까. 무엇이 중년의 남성을 열받게 하는가.
 아버님은 누군가의 아빠를 의미한다. 또는 나이 든 남자를 뜻하기도 한다. 우리가 흥분할 때의 아버님은 나이 든 남자와 성적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남자가 겹쳐졌을 경우다. 남자아이는 엄마를 좋아하고 여자아이는 아빠를 좋아하는 오이디프스 콤플렉스가 있다. 콤플렉스가 극복되고 성적으로 성숙하면 엄마와 아빠는 성적으로 접해서는 안되는 금제의 대상이 된다.

 때문에 나를 모르는 성숙한 여인이 부르는 '아버님'은 '너는 성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늙은 남자'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늙어도 남자인데.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여자 생각하는 게 남자라는데. '모든 여자에게 성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취급받으니 열받는 거다. 아니, 누가 사귀자고 했냐고. 왜 나를 거세하냐고. 흥분할 만 하다. 실제로는 부르는 사람에게 화내는 게 아니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거다.

 오빠, 아저씨, 삼촌, 자기, 아버님, 선생님. 어떤 호칭이 좋을까. 오빠나 자기는 아니다. "오빠", "동생" 하더니 "여보", "당신" 하고. '자기'는 서로 사귀는 사이에 주로 부르니 당연히 아니다. 여자들에게 아줌마가 있다면 남자에겐 아저씨가 있었다. 아줌마와 아저씨가 깔보는 어감이 있어서 이모, 고모나 삼촌으로 변했다. 그래도 아저씨를 많이 썼는데 이제는 이마저 힘들다.

 아저씨는 원빈 이후와 이전으로 나눠진다. 아저씨란 단어의 의미가 협소해졌다.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은 정말 멋있다. 꽃미남이 식스팩까지 갖고 있다. 가족애, 이웃에 대한 사랑, 열정, 냉철함, 판단력, 정의감, 전략, 액션, 과묵함.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아저씨다. 나를 지켜주는 그는 멋진 남자다. 40~50대 중년은 아저씨란 단어의 용처에서 제외됐다.

 프리큐는 'Ay Josh(아저씨)'에서 "내 나이 서른에 이젠 나도 모르게 손가락질 하며 잔소리만 늘었네. 하지만 난 아직 젊다네. 몸은 30 but 맘은 20, 아직 좀 놀 줄 아는 아저씨"라고 노래했다. 장미여관도 "나이 서른이 넘도록 울고 있는 나는 주책맞은 아저씨. 아, 나는 혼자 있네"라고 한탄한다. 원빈 만큼 멋지진 않지만 어쨌든 30대들이 자신의 20대 젊음과 대비하며 스스로를 아저씨로 부른다.

 부를 호칭이 마땅히 없다. '선생님'이란 호칭도 그렇다. 존경하는 이에게 쓰는 호칭이지만 선생님이라 불러달라고 요청하기도 힘들다. 상대가 '아버님'이라 부른다고 화내지 말고 나 스스로 아저씨로 비비고 들어가야 한다. 할 수 있다.

 2년 전 경험이 생각난다. 병원을 나선 뒤 바로 집에 가 입고 있던 어르신 냄새가 나는 남방셔츠를 버렸다. 아내가 떨이로 사온 셔츠인데 디자인이 온통 사각형이고 색깔도 침침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바로 청바지와 시원한 청색 남방셔츠를 사입었다. 아내의 향수도 훔쳐 뿌리고 스킨도 열심히 발랐다. 아낙들의 눈빛이 달라졌었다. 한동안 신경끊고 있었는데 다시 옷차림과 외모에 신경 좀 써야겠다.

 종합검진을 마치고 문진시간이 됐다.나이가 나보다 좀 어리거나 비슷해 보이는 남자의사가 친절하게 설명한다. "고지혈증도 있고 혈압도 높아요. 남 탓하지 마세요. 기계 오랫동안 막 쓰면 어떻게 되죠. 약도 드시고 생활습관도 고치세요." 근데 이 양반, 말이 좀 많다. "마음은 젊지만 몸은 그렇지 않죠, 아버님." "예.(근데, 내가 왜 내가 당신 아버님이냐! 이 아버님아)"

 




세종=최창환 대기자 choiasia@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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