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잘 사는게, 잘 죽는 것이다
그의 체온, 그와 나눈 대화와 한끼 식사가 아직도 생생하다. 유족들은 가장의 죽음이 더더욱 실감나지 않는다. 멍한 상태에서 손님을 치르느라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다. 벗들과 친지들은 장례식장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본다. 대부분 거기가 끝이다. 어지간히 친하지 않으면 세상을 하직한 벗의 가족과는 멀어져 간다.
"남아 있는 가족들은 어떡하지." "돈은 좀 있나." "애들은 몇살이야." 대화는 가족들의 미래로 넘어간다. 가족을 먼저 남기고 간 망자의 무심함을 나무라기도 한다. 감정이입을 한다.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면 조금 슬퍼진다. 남아있는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물론 죽음이 당장 눈앞에 닥쳤을 때는 어떨지 모른다. 그러나 머리속으로, 아니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당장의 화학반응은 그렇다.
예금은 얼마고 보험이 얼마나 되는 지도 따져본다. 혹시 일이 날 경우 아내가 어떻게 처리할 지 걱정도 하고 어떻게 알려줄까 궁리도 해본다. 쥐뿔도 없지만 걱정은 부자보다 많다. 가족들의 미래를 위해 좀 더 치밀하게 만약에 대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한다. 자식들의 사랑을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사랑은커녕 자식들의 원망조차 묵묵히 받아들인다. "해준 게 뭐 있냐", "누가 그런 걸 바랐느냐"는 원망을 "내 탓이오"하고 참아내는 경우가 많다. 이유가 뭘까.
아이들은 기적이다.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이상의 시보다 한없이 거슬러 가야 한다.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생명이 등장한 뒤 40억년의 세월동안 한 번도 중간에 끊기지 않고 살아남은 존재다. 자식은 40억년의 기적을 이어주는 기적의 화신이다.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세월호 참사가 더 애통한 이유다. 꽃피지 못하고 떨어진 아이들이 바로 우리의 아이다.
1년 전에 아버지가 된 후배가 있다. 아들이 감기 든 이야기를 하면서도 입이 벙글벙글한다. 아들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즐거워한다. 부친 얘기를 하면서 웃는 경우는 드물다. 아이들은 크면서 아버지에게 즐거움을 줬다. 기적을 이어주면서 즐거움까지 줬으니 아이들은 할 만큼 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자식 걱정을 하는 건 당연하다고 치자. 아내 걱정은 왜일까. 평소엔 마누라 욕하던 이들도 이 대목에선 알뜰살뜰 챙긴다. 그놈의 의리 때문이 아닐까. 자식 낳고 함께 고생하며 20년 안팎을 함께 살며 쌓아온 미운 정 고운 정을 '어찌 잊의리' 때문이다. 아내 얘기를 진지하게 하면 대한민국 남성들은 팔푼이 취급받기 십상이다. 아내 걱정을 하더라도 에둘러서 한다.
"인생 뭐 있어." "한 번 뿐이야." "건강해야 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자신의 삶으로 화제가 돌아온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즐겁게 살자는 쪽으로 물꼬가 트인다. 마누라 걱정하다 바로 딴 생각한다. 죽음이 바로 옆에 있다는 생각이 들면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해진다. 한 번 뿐인 삶을 덧없이 보내지 말자는 의욕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손님을 치러낸 상주들이 슬픔을 느낄 무렵, 조문객들의 분위기는 조금씩 풀려간다. 악상이라 조심스러웠던 마음가짐도 느슨해진다. 웃음소리가 들리는 경우도 있다.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떠올랐던 당혹감과 슬픔이 남겨진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변한 뒤 나의 삶으로 귀결된다.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사람이라 어쩔수 없나 보다.
우리는 죽으면 강을 건넌다. 그리스신화에서 사자(死者)는 레테(Lethe)강을 건넌다. 강물을 마시면 이 세상을 잊는다. 기독교인은 요단강을, 불교도는 삼도천(三途川)을 건넌다. 이도저도 아니면 황천(黃泉)에 간다. 벗이 레테강을 건너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슬픔을 잊고 삶으로 돌아온다. 삶이 가벼워서인지 무거워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망자가 세상을 잊기도 전에 삶으로 돌아와 버린 결례를 먼저 떠난 친구가 용서해줬으면 좋겠다.
최창환 대기자 choiasia@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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