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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서재에서]글 한줄 잘못써도 징역살던 시절 … 나는 '책 변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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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용의 '사람읽기' 인터뷰-'시국사건 1호 변호사' 한승헌

'김지하의 오적' 등 필화사건 도맡아 변호 … 출판사 운영하며 저작권법에도 관심
"국내선 제가 선구자죠"



윤승용 논설고문(얼굴)의 '리더의 서재에서'는 CEO와 경제지식인들의 지적보고(知的寶庫)를 탐방해 깊이있는 성찰의 결과들을 함께 음미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윤 고문은 언론사 기자 출신으로 국방홍보원장, 참여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냈으며 저서 <언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등을 출간했습니다.
한승헌 변호사의 프로필을 정리하다 보니 원고지 한 장으로는 어림도 없다. 물론 올해가 팔순이니 살아온 이력도 시공간적으로 짧지도 좁지도 않아서이겠지만 법과 법정, 문학과 해학,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을 헤쳐오며 시대의 아픔을 함께해온 궤적이 가히 일가를 이루고도 넘쳐나기 때문일 터이다. 이제는 역사박물관으로나 들어갔어야 할 어휘인 '시국사건', '인권변호사', '필화사건' 등이 등장하는 역사의 현장에 항상 함께했던 한 변호사는 한때는 변호사직을 박탈당하고 끼니마저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고, 국민의정부 때는 관료들의 저승사자인 감사원장이라는 고위직책을 지낸 굴곡진 인생을 살아왔지만 항상 신념과 웃음을 잃지 않아 온 것으로 유명하다.
 요즘에도 지하철을 타고 각종 모임 참석을 거르지 않는 등 왕성하게 활동 중인 한 변호사를 만났다. 1시간여 계속된 인터뷰는 그의 인생에 대한 따스한 해학과 풍자와 골계의 미학이 넘쳐나는 즐거운 담론 그 자체였다.

'시국사건 1호 변호사' 한승헌

'시국사건 1호 변호사' 한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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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권의 저서를 보면 역사적 체험도 다양하지만 폭넓은 독서이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청소년기의 독서는 어떠셨는지요.
▲초등학교는 일제하에서 다녀서 제대로 책을 볼 만한 게 없었지요. 해방 후인 1947년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조잡한 세계문학전집 외에는 역시 책다운 책이 없었고요. 그때 우연히 접한 <백범일지>는 내게 평생 큰 감동과 위안을 준 책입니다. 책 사볼 돈이 마땅찮아 전주 시내 책방에 가서 시사잡지를 즐겨봤습니다. <민족공론>, <삼천리> 등의 잡지가 기억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불쌍한 세대입니다.

-호가 산민(山民)이던데 산골출신의 이력에 맞게 절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의 작품입니까.
▲1970년대 초에 서울 인사동의 고서점 '통문관' 2층에 있는 '검여(劍如) 서실'에 다니면서 서예를 배운적이 있어요. 그 서실의 운영자가 금석학자이자 서예가로 유명하신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선생이셨는데, 그분께서 아호를 내려주셨죠. '뫼 산(山)'에 '백성 민(民)', 산민(山民)으로요. 제가 산골 출신이어서 그렇게 지어 주셨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때 써 주신 휘호에 '한승헌 선생 근재산민(近在山民)'이라고 쓰여 있었거든요. '서민 또는 민중들과 가까이 있을지어다'는 뜻이었던 겁니다. 이른바 사회적 약자나 소외받는 계층 등을 멀리하지 말라는 당부였다고 생각해요. 검여 선생께서 일깨워 주신 '산민정신'을 지금껏 소중하게 마음에 새기며 살아오고 있어요. 그 후에도 여러분이 다른 아호를 지어 주려 했지만 절대 받은 적이 없을 만큼 산민을 아끼고 있죠.
-출판사를 운영하기도 했지요.
▲1975년 잡지 <여성동아>에 쓴 <어떤 조사>란 글이 문제가 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살고 8년간 변호사 자격 정지를 받았지요. 사형 반대에 대해 쓴 에세이가 문제가 된 건데 제목 그대로 사형 집행된 사람에 대한 조사의 형식을 빌어서 사형 제도를 비판했어요. 제가 1975년 초에 시국 사건을 맡으면서 김대중 대통령 선거법 위반 사건과 김지하씨 사건 등을 변호 중이었는데 중앙정보부에서 사퇴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사퇴를 안 하고 버텼더니 그 보복으로 그 글을 문제삼아 반공법으로 몰아세운 겁니다. 여러 분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는데 생활의 방편으로 출판사를 차렸죠. 책을 40여권 냈는데 처음에는 제법 장사도 됐죠. 당시 유명 필자들인 김동길, 지명관 선생 등의 원고를 제가 받을 수 있었던 거죠.

-한국에서 저작권법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셨죠.
▲출판사를 운영하다 보니 자연히 저작권법에 관심을 갖게 됐죠. 그런데 당시 한국에선 저작권법 체계가 엉망이었고 국제저작권법에 대한 개념도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1976년 한국저작권법연구소를 창립해 초대 소장을 맡았고, 이어 1980년 계엄법위반 혐의로 수감생활하던 때 집중적으로 저작권법을 연찬했어요. 당시 대학에도 관련 강의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전두환씨 덕분에 공부를 하게 된 셈이어서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웃음) 출감 후에는 중앙대 등에서 관련 과목을 개설해 시간강사도 하며 후학들을 키웠습니다. 1988년에는 <저작권의 법제와 실무>라는 서적도 내는 등 나름 열심히 하다 보니 제가 저작권법 선구자가 돼버렸습니다.

-법조인이면서 문인들과 교유가 깊은 것도 흥미롭습니다.
▲물론 제가 시를 좋아하면서 시인협회 회원 등으로 문단의 말석을 차지한 덕도 있지만 각종 필화사건 변호를 하다 문단에 가까워진 측면도 있습니다. 김지하의 오적 사건, 남정현의 '분지'사건, 월간 '다리'지 사건, 조금 성격은 다르지만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사건 등 각종 필화사건을 도맡아했습니다. 군사정부시절에는 출판사들의 이른바 이적표현물 관련 사건 등도 맡았었구요.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를 맡기도 했지요. 어느 자리에서 저를 문인이라고 표현하길래 제가 그랬지요. 이때의 문인은 '무인(武人)이 아니라는 뜻'이라구요.(웃음)

-수많은 시국사건 변호를 맡으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과 인물을 든다면.
▲제가 100건 넘게 변호를 했는데 그 하나하나가 다 기억에 남습니다. 굳이 한 건을 들라면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을 들고 싶네요. 그 내용의 황당함이나 법정에 섰던 피고인들의 당당한 법정 투쟁 등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또한 그 배후로 몰려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판결을 받은 다음 날 '사법살인'으로 사형당한 인혁당 사건의 경북대 여정남씨가 기억납니다. 제가 변호하던 피고인이 사형당한 첫 케이스입니다. 그때 마침 저도 서대문구치소에 필화사건으로 수감 중이었는데 여씨가 새벽에 제 방문 앞을 지나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 그 사실도 모르고 저는 제 감방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 대성통곡했습니다.

-유머에 관한 일화도 많던데요. 제가 기록을 찾아보니까 무진장하더군요. 예를 들면 국제저작권 포럼에서 영국 대표가 '한국은 출판물 해적국가'라고 몰아붙이자 "영국인이 해적을 욕하면 조상을 모독하는 것이지요"라고 맞받아쳤지요. 유신 시절 긴급조치 위반 사건에서 검사의 구형을 법원이 낮추지 않고 항상 같은 형량을 선고하자 "우리나라 정찰제는 백화점이 아니라 법정에서 비롯됐다"고 했지요. 유머의 자산은 어떻게 얻으셨나요.
▲어머님이 무학이셨지만 머리가 좋으셔서 뒤늦게 한글을 깨우쳤지만 소설책도 읽으실 정도가 되셨지요. 어머님은 아무리 힘들더라도 항상 웃음과 해학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어릴 적 삶의 연륜이 배어 있는 어머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제게는 소중한 웃음의 자산입니다.

◆'시국사건 1호 변호사' 한승헌 약력
▲1934년 전북 진안생
▲전주고, 전북대 정치학과 졸
▲부산지검, 서울지검 검사
▲1965년 변호사개업
▲1975년 <어떤 조사>필화사건으로 반공법위반혐의로 구속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위원장
▲감사원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사법개혁추진위원장 역임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현)
▲<한국 법치주의를 검증한다>, <산민객담> 등 저서 40여권





윤승용 논설위원 yoon673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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