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통계에는 그러나 중대한 함정이 있으니 니트족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트(NEET)족이란 교육도 직업훈련도 받지 않는(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미취업자를 말한다.
생산에 참여해도 마찬가지이다. 대망의 21세기에는 맞벌이를 해야 근근이 먹고 살 수 있는데, 이 점은 세계적으로도 많이 다르지는 않다. 독일에서 흔히 대화에 떠오르는 화제 중 하나가 "우리 할아버지대에는 가장이 서너 시간만 일을 해도 식솔들을 먹여 살렸는데, 나는 야근까지 해봐야 혼자 살기에도 벅차다"는 것이다. 그 원인에는 소비의 심화도 있을 것이고 부의 편중도 있을 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1800년부터 200년간 "경제 성장률보다 자본의 수익률이 높았다"는 토마 피케티의 분석에서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피부로 공감하는 것이다. 여기에 지그문트 바우만의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관점이 덧붙여지면 더욱 암울하다. 현대 자본주의가 생산자 중심에서 소비자사회로 이동하면서 구매력이 없는 집단은 더 이상 구제의 대상이 아니고 배제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생산과정에서 배제돼 소득이 없는 젊은이에게 빈곤은 구조적이어서 장기적일 뿐만 아니라 점차 자기책임의 죄악이 되고 있다. "가난한 집 애들이 설악산이나 경주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가면 되지, 왜 배를 타고 제주도를 갔느냐"고 한 모 목사를 보자면, 그 직분을 잊은 죄보다 철없이 공동체의 부재라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터부를 건드린 죄가 더 크다.
19세기 후반 제정 러시아의 알렉산더 2세가 암살되면서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가 지배하기 직전인 1878년, 투르게네프는 <거지>라는 시를 썼다. 요약하자면, 길에서 거지를 보고 적선하려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어 안타까웠는데, 거지가 알아보고 서로 마음을 주고받았다는 '훈훈한' 이야기이다.
어느 쪽에서 집권하든 총리만 임명하면 메기를 풀어놓겠다고 을러대는, 도태는 곧 죽음인 무한경쟁사회에서, 지금 20대는 이러한 생산체제에마저 편입되지 못해 구매력도 없고, 따라서 소비사회에도 한 발만 걸친 잉여집단이 되고 있다. 이들에게 아무 관심도 주지 않으면서, 민주주의를 들먹이며 어제 왜 투표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은 뻔뻔하다.
김환학 서울대 행정연구소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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