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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학의 낯선시선] 투르게네프 언덕의 니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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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학 서울대 행정연구소 특별연구원

김환학 서울대 행정연구소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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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최근 공개한 자료(Society at a Glance 2014)에 의하면 2013년 2분기 한국의 실업률은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3.3%(OECD 평균 9.1%)라고 한다.

이 통계에는 그러나 중대한 함정이 있으니 니트족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트(NEET)족이란 교육도 직업훈련도 받지 않는(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미취업자를 말한다.
이는 제도교육이 얼마나 직업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인데, 결과적으로 실업보다 더 심각한 취업포기, 즉 백수상태를 의미한다.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는' 경제활동인구가 아니면 실업자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니트족이 늘어도 실업률에는 영향이 없거나 오히려 낮아지는 효과가 있다. 우리나라 15~29세의 청년층 중 약 18%가 니트족이며 고학력으로 갈수록 더 심각하단다. 이들은 생산에서만이 아니라 통계와 국가정책에서도 소외되고 있다.

생산에 참여해도 마찬가지이다. 대망의 21세기에는 맞벌이를 해야 근근이 먹고 살 수 있는데, 이 점은 세계적으로도 많이 다르지는 않다. 독일에서 흔히 대화에 떠오르는 화제 중 하나가 "우리 할아버지대에는 가장이 서너 시간만 일을 해도 식솔들을 먹여 살렸는데, 나는 야근까지 해봐야 혼자 살기에도 벅차다"는 것이다. 그 원인에는 소비의 심화도 있을 것이고 부의 편중도 있을 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1800년부터 200년간 "경제 성장률보다 자본의 수익률이 높았다"는 토마 피케티의 분석에서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피부로 공감하는 것이다. 여기에 지그문트 바우만의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관점이 덧붙여지면 더욱 암울하다. 현대 자본주의가 생산자 중심에서 소비자사회로 이동하면서 구매력이 없는 집단은 더 이상 구제의 대상이 아니고 배제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생산과정에서 배제돼 소득이 없는 젊은이에게 빈곤은 구조적이어서 장기적일 뿐만 아니라 점차 자기책임의 죄악이 되고 있다. "가난한 집 애들이 설악산이나 경주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가면 되지, 왜 배를 타고 제주도를 갔느냐"고 한 모 목사를 보자면, 그 직분을 잊은 죄보다 철없이 공동체의 부재라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터부를 건드린 죄가 더 크다.

19세기 후반 제정 러시아의 알렉산더 2세가 암살되면서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가 지배하기 직전인 1878년, 투르게네프는 <거지>라는 시를 썼다. 요약하자면, 길에서 거지를 보고 적선하려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어 안타까웠는데, 거지가 알아보고 서로 마음을 주고받았다는 '훈훈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일본 강점기를 살면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는 1939년 <트루게네프의 언덕>이라는 시에서 이를 비튼다. 남루한 아이들을 보고 주머니를 뒤졌더니 있을 것은 다 있지만 내줄 용기가 없어 만지작거리기만 했다는 내용이다. 낭만주의에서 리얼리즘으로 전이됐다고 할까? 이 투르게네프의 언덕에서 20대들은 재벌농도가 0%인 핏줄 속에 크림맥주를 털어 넣는다. 어느 나라 맥주에 비교해도 밍밍하고 맛 없지만 500㏄ 두 잔에 로맨틱한 잔거품을 씌워 눅눅한 감자튀김을 곁들이면, 비좁은 공간에서 배부르지도 취하지도 않게 만원이다.

어느 쪽에서 집권하든 총리만 임명하면 메기를 풀어놓겠다고 을러대는, 도태는 곧 죽음인 무한경쟁사회에서, 지금 20대는 이러한 생산체제에마저 편입되지 못해 구매력도 없고, 따라서 소비사회에도 한 발만 걸친 잉여집단이 되고 있다. 이들에게 아무 관심도 주지 않으면서, 민주주의를 들먹이며 어제 왜 투표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은 뻔뻔하다.





김환학 서울대 행정연구소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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