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사관 집안 출신으로 10세 때 고전을 암송하고 20세에 천하를 주유하여 역사와 사회를 보는 안목을 키웠다. BC 108년에는 아버지 사마담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순탄한 사관의 길을 밟던 그의 삶은 BC 99년 이릉 사건에 휩싸이면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릉은 명장 이광의 손자로 이사장군 이광리를 수행하여 흉노정벌에 나갔다가 적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한무제 앞에서 이릉을 변호하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 생식기를 거세당하는 궁형에 처해진다. 선비의 자존심을 지키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버지의 유언을 완수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사마담은 임종 시 "내가 태사령의 직위에 있으면서도 천하의 역사를 폐기하고 말았다. 내가 죽으면 너는 태사령의 직책을 잇게 될텐데 아버지의 뜻을 잊지 말아라"는 유언을 남겼다. 결국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그는 궁형의 치욕을 감수하였다.
사기는 완성하는데 20여년이 소요된 역작으로 송사, 금사, 요사, 원사가 1~3년 만에 졸속으로 만들어진 것과는 크게 대조된다. 사기는 24사 중 군계일학으로 한서, 자치통감 등 다른 사서와 달리 애증의 감정 서술이 풍부하다. 특히 문체가 뛰어났고 53만 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무엇보다도 일종의 민중사로 그 시대의 풍속, 지리에 관한 상세한 묘사로 매우 생동감이 넘친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산 시대 배경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역사관이다.
사기는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인간의 행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서술되었다. 그런 점에서 유물사관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마르크스나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헤겔의 역사철학과는 차이가 있다. 사기는 아웃사이더인 사마천의 자유의지 철학이 적나라하게 표출된 사서로서 상투적인 틀을 과감히 파괴한 책이다. 스스로 쓰고 싶어서 쓴 역사서다. "사람은 언젠가 한 번 죽습니다.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도 있고 새털보다 가벼운 죽음도 있습니다"라는 사마천 고유의 역사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당나라 학자 유지기는 사관은 사재(史才), 사학(史學), 사식(史識) 세 가지 재주가 필요한데 그 중 사식, 즉 역사인식이 가장 중요하다 했다.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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